한국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랐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커서는 남편의 뜻에 따랐으며, 나이 들어서는 자식의 뜻에 따르라는 지상명령과도 같은 전통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한 면을 또 다시 보인 작품을 만난다. 어명(御命)을 받아 만리타국으로 떠나는 자식의 손에 쥐어준 한 시문에서 모성애를 엿보게 되는데,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이었을 때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며 절명했던 선인들이 많았다. 왜놈들의 침략에 더는 못살겠다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선현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방이라는 수순이 진행되는 순간 많은 열사들이 목숨을 던졌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나라를 구하는 열사들의 숨은 노력이 컸다. 푸른 하늘 위에 조선 태양만이 있을지니, 창해 역사의
깊은 산골 마을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들면 온 동네가 욱신거린다. 잔칫집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복실이 엄마도 술 한 주전자를, 떡남이 누나는 전 안주를 부쳐 들고 오며 손님을 반기기도 한다. 하룻저녁만 더 자고 가라고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옷자락을 휘어잡는 늙은이들도 있다. 정감 넘치는 우리네 풍경이자 미담이다. 너무 고마워라 먼 길손 위로하는 고을 늙
거울을 보면서 자기를 조롱하며 던지는 말은 ‘이 사람아 자네 그게 뭔가. 할아버지 다 되셨네 그려’하면서 자기 얼굴 변색을 두고 한 마디 던진다. 백발과 은근한 대화의 한 마디. 그러면서 지나간 청춘도 원망한다. 청춘시절에 내 얼굴도 옥처럼 고왔거늘 하면서... 머리카락만 희끗희끗한 것은 아니다. 주량은 백발을 능가한다. 주량이 느는 만큼 가진 돈일랑 몽땅
아내를 골려준다고 한다. 농弄을 잘하고는 남편의 짓궂은 장난기다. 기실 아내를 골려준다고 하지만 시집 와서 무서운 시부모님을 섬기랴 크고 작은 집안 일 살피랴 눈코 뜰 새 없는 아내를 보면서 안쓰러워 위로를 겸해서 던지는 말이나 시심의 발로다. ‘여보! 당신 속마음 내가 잘 알지’ 한 마디를 생각할 수 있으리라. 다정해라 석 달 내리 기나긴 비 내리게 되면
음양은 대체적으로 양이 위에 음이 아래에 존재한다. 양은 불록하고 음은 오목하다. 볼록한 양으로 오목한 음을 감싸안고 두 가슴을 비비면서 내川가 되고 강江이 되는 수가 많다. 그렇지만 맷돌은 그렇지 않다.음이 양을 한껏 부여안고 가슴을 비벼 대면서 사랑을 속삭이는가 싶더니만 곡식을 갈아서 삼시 세끼를 이어가게 했다. 맷돌이 철의 기둥은 땅에서 하늘까지 꿰뚫
타향에서 생활하다보면 고향을 잊는 수가 많다. 그렇다지만 낯선 곳에 가 있더라도 선뜻 고향을 떠올리는 수가 많다. 산수山水를 고향과 비교하는 수가 많다. 고향이 가까이 있다면 그 쪽 하늘을 쳐다 보면서 ‘지척이 내 고향이련만 여기에서 얼마가 더 가면 고향일까’를 떠올리는 수가 많다. 수구지심首邱之心이 많은 애향심의 발로다. 땅에 떨어진 꽃은 빈산에 가득 차
뜰의 봄풀이 봄비를 맞으면 무럭무럭 자란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본다. 많이 자라다 보면 섬돌을 뒤덮고 풀인지 꽃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무성하게 자란 정원을 보면서 흔히 쑥대밭이 된다고도 했다. 제 시절을 만났으니 제각기 자기 자랑을 할 태세다. 아니 자기 생을 구가해야만 한다. 몇 풀끝은 봄바람에 간지러워 재주가 있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를 했던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랑은 또래가 맞아야 한다고도 한다. 이것마저도 마지노선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면 사랑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시중을 드는 50여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아가씨가 시인을 사모한 나머지 구애를 했으렸다. 변양이시여! 부디 내 나이 일랑 더는
구름의 종류도 많다. 흰 구름, 뭉게구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구름의 모양과 비를 뿌리기 위해 변덕을 부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붙여 놓은 이름이다. 구름과 날씨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름이 비를 몰고 오는가 하면 바람을 마중 나가는 수가 많다. 변덕부린 전초전이겠다. 백운이 산허리를 휘감을 양이면 한 폭의 그림이다. 이 가을에 백운처럼 홀연히 이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거나 임금이 바뀌는 틈바구니 속에서 자칫 정적에 몰려 사약을 받거나 적소謫所로 귀양을 가는 경우는 허다했다. 흔히 있었던 일이지만 이를 당하는 당자사들에게는 크나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형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걱정했던 건 내조했던 부인이다. 먹을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한다. 꿈결 속에는 천리 밖에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늘 푸른 돈대墩臺를 향해 오르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적취대는 구불구불한 바위 위에 솟아 있다고 했으니 바위 위에 난간을 척 버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난간의 어귀에 오르려면 힘이 들어 무언가 비빔손이나 간곡한 자기 소망을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뭄이 들어 온 대지가 타들어 가고 있을 때 어찌하여 인간에게 비는 내리지 않고,
해오라기를 보면 낚시질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먹이 사냥을 위한 방식이자 휴식이다. 낮에는 논·호반·소택지·갈대밭에서 생활하며 밤에 먹이를 찾는 습성이 있단다. 어류·새우류·개구리·뱀·곤충류·설치류 등을 주로 먹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에선 중부지방에서 번식하는 여름 철새다. 대나무 숲속에는 아무도 찾아 볼 수 없는데, 무논
대체적으로 [화수花鬚]는 꽃의 수술과 암술을 가리킨다. 꽃의 암술과 수술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 송이 꽃 속에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꽃의 모습이 어우러지고 꽃잎까지도 불그스레 보인다.이를 가리켜 흔히 꽃이 붉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꽃이 붉다는 것은 이를 두고 가리킨 말이다. 봄부터 피어난 모든 꽃술에는 다 붉음의 차이가 있나니, 삼
사소절은 선비·부녀자·아동교육 등 일상생활에 예절과 수신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며 당시의 풍속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주자학의 관념유희(觀念遊戱)를 배격하고 보다 현실적인 교육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교육제도와 전통적인 관념으로 보아 현실성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사회에 획기적인 등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섭생을 잘 하여 야윈 몸을 추스르는 것이 부처님께
조선의 제도는 철저한 부권주의였다. 곧 남성위주 사회였다. 어려서 시집온 여자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창부수夫唱婦隨를 제일로 여겼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나설 수도 없었고, 시가를 지키며 살았다. 당시의 제도이고 관습이었다. 하 많은 세월동안 남편을 기리면서 살아야만 했었다. 15세가 못되어 시집온 여인이 마음에 얽히고설킨 심사를 하소연이나 하고자 하나
모진 추위가 몰아닥치면 온통 세상이 달리 보이는 수가 있다. 푸르른 산도 검게 보이고 깎아지를 산의 바위도 그 절경을 자랑하더니 쏟아질 듯한 날카로움을 보인다. 모진 추위에 한양의 모습을 시인의 눈에는 달리 보였으렸다. 그 뿐이겠는가. 사람의 발길도 끊어지고 옷깃을 추켜 세운 사람들은 종종 걸음으로 안식처를 찾아간다. 매란 녀석 한 마리 하늘을 지나자 나무
길을 걷다가 보면 비둘기 떼를 가끔 본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발길에 차이는 수도 있다. 먹을 것을 찾다 보면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른다. 사람을 보면 제법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는 모양새도 느끼게 된다.사람을 따르는 비둘기가 지팡이 끝에 앉아 있었다. 동그마니 앉아 있는 모습의 느낌이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비둘기가 눈 같은 흰 옷을 다소곳이 입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와 한가하기 그지없는 농촌의 차이는 많았다. 요즈음 도농都農의 극심한 차이를 그 때나 지금이나 실감하게 된다. 도시에 살다가 담장도 없이 살고 있는 시골집의 풍경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농촌을 찾는 시인이나 묵객 그리고 사대부들은 그 풍경을 읊기에 바빴겠다. 뜰에는 수둑하게 쌓여있는 우렁이 빈 껍질이 있고,
금강산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산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렇다. 중국인들이 탄복을 하면서 신의주新義州를 거쳐 북한에 들어가 관광하려는 제일의 목적이 금강산을 찾기 위함이라는 말을 수차례에 걸쳐 들었기 때문이다.이런 금강산을 두고 우리 선현들이 남겨놓은 시문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금강산은 해가 떠서 구름이 모두 걷히고 산만 우뚝 서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