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바로 옆에 있었던 독립협회와 일진회 사무실아래 사진은 독립협회와 일진회의 사무실이다. 왼편의 독립관은 청나라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1896년 개수하여 독립협회가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회의를 개최하거나 시국 집회,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열었다. 한편 독립관 우측의 팔각형 양관(洋館)에는 친일 매국 단체 일진회(一進會)가 자리를 잡고 조선의 문명개화를 촉진한다는 핑계로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일진회는 지붕에 일장기를 달아놓고 활동하였다.독립협회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1898년 10월 하반기부터 11월 초까지 독립협회는 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6조(獻議六條)를 황제에게 헌의하고 이에 따라 중추원제가 공포되어 중추원 의관을 임명하게 되었는데 남궁억도 당연히 의관에 포함되었다.중추원 의관에 임명되다당시 임용된 중추원 의관은 아래와 같다. 고종 35년 무술(1898) 10월 16일(병신, 양력 11월 29일) 맑음 35-10-16[13] 중추원 의관에 고영근 등을 임용하였다. 중추원 의관에 고영근, 이남규, 홍종억, 이교석, 윤시병, 홍종우, 이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남궁억의 독립협회 활동 남궁억의 독립협회에서의 활발한 활동은 여러 자료에서 발견된다. 특히 차상찬은 그가 발간하였던 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남궁억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공개연설(公開演說) 광무 2년 무술 12월 이십팔일이다. 독립협회는 종로대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一名 : 官民共同會)를 열고 회장 윤치호, 부회장 이상재, 서기 한만용, 임진수 등이 착석한 후 회장, 부회장을 위시하여 당시 동회의 맹장인 남궁억, 유맹 등이 정부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대립이처럼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등이 민중계몽의 범주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까지 주장을 펴자 근왕 수구파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황국협회였다. 백성의 참정권 주장과 정치 참여 요구, 부패 또는 무능력한 정부 관료들에 대한 탄핵이 계속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정부세력과 대신들은 독립협회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보부상 등을 통해 이러한 소문을 확산시켰다. 또한 독립협회 일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남궁억은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과 이후에 발행된 독립협회의 또 다른 기관지 『대조선독립협회보』 발간(1896.11.30)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황성신문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모곡학교를 신설하고 학교 교과서가 필요할 때 『독립신문』 한글판을 편집했던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조선문법』이나 『조선어문법』, 『조선어보충』(역사책)을 발간할 수 있게 된다.한서 선생은 학생들에게 조선어에 대한 흥미를 돋우어 주기 위해서 재미나는 사화(史話)와 독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 독립협회 발기인에서 총대의원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활동 이어서 독립협회 발기인대회(1896. 6. 7)가 열렸다. 이날 발기인대회에서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는데 이 위원회가 바로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서재필은 언론 활동과 함께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로 조직되었으나 점차 정치단체로 변모하고 있던 독립협회 조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헐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모금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고, 모화관(慕華館
□ 독립협회 활동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다독립협회의 발기인에서 총대의원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활동서재필의 귀국과 남궁억의 만남토목국장으로 일하면서 왕명으로 강원도 지방 선유사로 다녀오고 나서 조선에는 아관파천의 상황에서 또 다른 변화의 신호탄이 나타났으니 1895년 12월 서재필의 귀국이었다. 서재필은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학(漢學)에 능하였고, 일본 하사관학교에 유학하는 동안 일본어를 습득하고 군사학을 몸에 익혔으며, 미국에서 10여 년 사는 동안 영어를 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는 미국인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흥화학교와 YMCA 중학부에서 교육자로서 첫발을 딛다남궁억은 민영환의 흥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1903년도 황성기독청년회 즉 황성 YMCA 창립 이사위원 때부터 관계하던 YMCA에 중학부를 신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자 그곳에도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를 보면 남궁억에게는 ‘교육’이 숙명처럼 다가왔고 이를 계기로 평생 교육에 몸을 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YMCA 중학부 교사도배재의 음악교육에서 기억돼야 할 인물 중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흥화학교와 YMCA 중학부에서 교육자로서 첫발을 딛다남궁억은 토목국장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나가서 동국사와 영어를 가르쳤다. 또 YMCA 중학부에서도 수업하였다. 남궁억으로 확인해 본 각종 기록에는 흥화학교에서 가르쳤다는 기록은 나타나지만, YMCA 중학부에서 가르친 흔적은 남궁억을 검색한 자료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선생이 가르친 제자들이 ‘남궁억 선생에게서 배웠다’라고 자술(自述)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민영환의 흥화학교에서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 받다춘천 의병대장 이소응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더욱 힘을 내어 의병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남궁억을 강원지방 선유사로 파견한다. 거기에는 고종의 불가피한 선택이 있었다.고종의 입장에서는 아관파천으로 친일파가 괴멸되었으니 반일을 내건 의병도 활동을 중지하고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선유하게 되는데 선유를 담당할 적임자가 누구냐는 문제에 봉착하여 남궁억을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받다고종은 겉으로는 일본에 동조(同調), 속으로는 의병을 독려남궁억이 강원도 선유사로 파송되었을 때는 고종의 애통조(哀痛詔)가 이미 의병장에게 전달되었었다. 애통조는 1895년 12월 15일에 작성되어 1896년 초에 전국 각지의 향교에 보낸 것으로 1895년 겨울부터 격렬해진 전국의 의병들을 선무(宣撫)하기 위하여 발송한 조서이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인의 민비시해)과 단발령(斷髮令)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받다아관(俄館)은 조선 주재 러시아 영사관을 의미한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이야기이니 아관파천은 조선의 측면에서 보면 참혹한 일이었다. 임금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여 주재(駐在)한 외국 공간에 맡긴다?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정세가 이러니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강원도 춘천, 홍천, 횡성, 원주, 경기도 지평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의정부 내부 토목국장으로 한성 환경 개선여기서 내부 토목국장의 위치를 알아보자.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때의 내부는 해방 후에는 내무부, 현재로 보면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부서이나 토목국장은 업무의 특성상으로는 국토교통부에 속하는 업무라 할 수 있다. 내아문이 1982년 통리국군사무아문으로 바뀌었다가 1884년 10월 2일 의정부에 합부(合部)되고, 1895년 3월 26일 내부 관제에 따라 설치된 부서이다.당시 토목국장이면 내부의 대신, 참판, 다음의 직위로 내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토목국장으로 한성 중심부 도시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다남궁억은 1895년 1월 11일에 칠곡부사를 사임한 후 4월 1일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편되는 등 통치 체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조직인 내부 토목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러한 변혁은 이전에 없던 것으로 통치 기구 내에서도 그렇지만 백성에게는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이 변혁으로 기존 최상류 지배층은 대부분 물러나고 중견 관리층의 실무자들과 개화론자들이 대거 등용되었다.갑오개혁의 관제 개편으로 통치 체제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고종이 칠곡부사 남궁억을 순무사로 임명한 것으로 보아 고종은 동학농민군의 초기활동을 변란이라고 보았기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순무사를 임명한 것이다. 순무사는 칠곡부사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겸하여 수행하였다. 동학군을 소탕하라는 어명(御命)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당시는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반역이 되어 목이 달아나던 시대였다. 더군다나 고종은 남궁억이 곁에서 수년간 모신 임금이었다. 한성으로 전임 후 칠곡 유림(儒林)과 군민(郡民)이 세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남궁억은 1893년 4월 4일 경상도 칠곡부사로 임명받아 외직으로 나가게 된다. 조선시대 관직1)을 보면 사대부 양반들은 중앙에서 내직에만 일하는 예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승급하면 외직에 나갔다가 일정 기간 후에 다시 내직으로 임용되는 때가 많았다. 남궁억도 외직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경상도 칠곡부사였다.칠곡은 관리들의 토색이 심하여 청빈한 남궁억을 보내다남궁억이 지방직으로 간 것은 칠곡부사가 처음이다. 공직으로는 처음으로 받은 직명이 병조 부사용이며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 전개홍콩에서 돌아온 남궁억은 다시 고종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별군직에 임명되었다. 별군직에 임용되었다는 것은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별군직이 한직이기는 하나 늘 임금 앞에서 근무해야 했기에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임용하기 마련이다. 남궁억은 보통의 별군직 관료하고는 다르게 필요할 경우 영어 통역관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기에 더욱 필요한 인재였다. 왕의 호위 직책인 남행 별군직에 임용 별군직은 원래 병자호란(1636년) 때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그
□ 유럽 5개국 순방 전권대신의 참찬관(서기관)이 되다고종의 영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남궁억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당시 개국(開國)으로 외국과 교류가 활발하던 때였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사절단을 살펴보자.조선이 개국하게 되어 외국에 사절단 파견일본에는 두 차례의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다. 수신사는 1876년과 1880년 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다. 1차는 김기수, 2차는 김홍집이 수신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881년 박정양 등의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는 일본의 서구 문물을 조사
□ 우리나라 최초의 어전 영어 통역관 남궁억남궁억은 최초의 조선(경성)총해관(총세무사청) 해관원(海關員)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고종 최초의 영어 어전 통역관으로 임명받아 입궐한다. 이전에도 중국어 통역관 및 일본어 통역관은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영어 통역관으로 임명된 것은 남궁억이 처음이었다. 선생이 가는 길에는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생소한 길을 개척하며 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선생의 초기 관료 임면(任免) 자료『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수록된 남궁억의 초기 관료 임면 자료
□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원(海官員) 남궁억쇄국에서 개방으로 국가정책이 바뀌게 되자 외국과 무역도 해야 하겠고, 또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 계속해서 외국 여러 나라와 통상 및 수교 회담도 해야 하겠고, 조약도 체결해야 하였기에 정부에서는 준비할 일이 많아졌다. 이 일을 맡을 외국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외무협판과 총세무사로 임명되어 외교와 세관에 관한 자문에 응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교장인 묄렌도르프와 동문학에서도 함께 했고, 조선총해관에서도 함께 근무하였다. 이는 묄렌도르프가 동문학에서부터 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