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16)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 받다

춘천 의병대장 이소응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더욱 힘을 내어 의병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남궁억을 강원지방 선유사로 파견한다. 거기에는 고종의 불가피한 선택이 있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아관파천으로 친일파가 괴멸되었으니 반일을 내건 의병도 활동을 중지하고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선유하게 되는데 선유를 담당할 적임자가 누구냐는 문제에 봉착하여 남궁억을 파송하게 된다.

고종은 친일파가 몰락하자 남궁억을 선유사로 임명

고종은 남궁억에게 ‘그대는 내가 믿으니 춘천에 가서 소기의 뜻을 이루고 오라’라고 하며 밀명(密命)을 주었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애통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과 싸워 이겼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었으나 이제는 친일파를 몰아냈으니 의병들은 모두 평상의 생활로 돌아가라고 선유해 주도록 명(命) 받았을 것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중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됨에 따라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서면서 단발령 등의 개혁은 철회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2월 12일 남궁억을 강원지역 선유사로 파견한 것이다.

남궁억이 춘천에 도착하니 그동안 일본군과 경군(관군)에 의하여 이미 그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어 홍천에 있던 횡성진장(橫城陳長) 권대형이 경성을 직범(直犯)한다는 보고를 받고 곧 홍천으로 가서 의병 진중으로 들어갔으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상황은 이해가 된다. 고종이 애통조를 내려보내 일본군과 싸우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만 싸우고 본업으로 돌아가라니 아무리 임금의 명령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여 의병은 저항하면서 남궁억이 거짓으로 임금의 명을 전한다고 항의도 하였다.

당시 고종은 고통스러운 이중 조치를 하다

다시 정리해 보자. 을사의병이 일어나자 고종은 전국의 의병장에게 밀칙 애통조를 보내 여러 가지 권한을 부여하면서까지 항일(抗日)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겉으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정치를 손아귀에 넣은 일본과 친일 내각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에 ‘의병을 토벌하라’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며 친위대까지 보냈다. 어쩌면 우리 백성끼리 싸우도록 부추긴 격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 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남궁억은 선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복(公僕)

남궁억은 선유사의 직무를 어렵게 수행하고 한양으로 복귀하여 독립협회, 독립신문 발간 등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권력이 점점 제한받는 왕과 그 왕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남궁억! 엄청난 고뇌 속에 토목국장에서 면직되어 당분간 관직과는 멀어지면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독립협회 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특히 남궁억에게는 친일적 경향이 전혀 없었으므로 선유사로 파송될 수 있었다. 만약 친일파였다면 ‘일본을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궐기한 의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남궁억은 의병과 애통조, 친일파와 친러파, 아관파천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명을 충실히 따랐으며, 고종의 신뢰가 두터운 충신이었다. 남궁억의 고종에 대한 충성은 그가 후에 기록한 역사서에서 대군주(大君主)라고 표기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토목국장에서 면직된 남궁억은 독립협회와 황성신문 일에 매진하게 된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