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14)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받다

아관(俄館)은 조선 주재 러시아 영사관을 의미한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이야기이니 아관파천은 조선의 측면에서 보면 참혹한 일이었다. 임금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여 주재(駐在)한 외국 공간에 맡긴다?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정세가 이러니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강원도 춘천, 홍천, 횡성, 원주, 경기도 지평 등지에서 활발하였다. 이때의 의병은 을미의병으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나라 안이 흉흉한 데다 친일 내각이 단발령을 내림으로써 의병 봉기의 불을 붙였다.

 아관파천과 정세 변화

그런데 아관파천(1896.2.11)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1896.2.12) 고종은 남궁억을 춘천부 관하 의병을 선유하는 선유사로 파송하였다. 친일파 정권이 아니라 친러파 정권이 들어선 아관파천 바로 다음 날의 일이다. 

     1900년 전후 주한 러시아공사관. 오른쪽에 있는 탑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1900년 전후 주한 러시아공사관. 오른쪽에 있는 탑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남궁억은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정권이 들어서면서 반일을 주장하던 의병을 귀순 회유할 필요로 파견하게 된 것이다. 선유사(宣諭使)는 병란이 났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백성을 훈유(訓諭)하던 임시 벼슬이었다. 선무사라고도 하였다. 순무사와 선유사는 역할 상 큰 차이는 없으나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다소 달랐다. 
 
경험이 있는 남궁억을 선유사로 파견

남궁억은 1895년 1월에 칠곡부사로 있으면서 순무사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난 후 그 직을 사임하고 조금 쉬다가 궁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받아 내직으로 복귀하였는데 명성황후시해사건(8월, 명성황후시해사건), 단발령(11월) 등으로 의병 활동이 확장되어 정국이 혼란하게 되므로 강원도 춘천, 원주지방 선유사로 파견된 것이다.

선유사가 되어 춘천에 도착하니 이미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지고 홍천에서 의병장 권대형(횡성진장(橫城陣將))이 ‘경성을 직범(直犯)한다’하여 곧 홍천으로 가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의병 진중으로 들어가 조명(朝命)을 전하였으나 의병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남궁억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다음 자료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아관파천, 단발령 등으로 반일감정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각 지방에서 의병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자 조정에서는 어전회의를 열어 박정양이 주품, 단발령에 대한 선유사(宣諭使)로 남궁억을 임명한 것이다. 한서는 선유사 임명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것은 동학란의 순무사 시절 겪었던 고초 때문도, 결코 단발령을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단발령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솔선하였으며 그 당위성에 대해 백성을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단발령의 공포 시기와 추진하는 주체에 대한 불만과 또 의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충정을 이해했으므로 그들에게 궐기의 명분을 주고 설득하라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자신이 싫다고 거절하는 것 또한 명분 없는 일, 분연히 일어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칠곡군수로 재직하면서 동학농민병을 만나 본 남궁억으로서는 왕명과 민심이 이반(離反)되어 있는 선유활동은 고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내심 그러한 직책을 다시는 맡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병(義兵)은 명분도 뚜렷하고 고종의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이를 실행하고 있었다. 즉 고종이 겉으로는 일본의 힘에 밀려 일본에 협조하여 의병 토벌을 위해 경군(京軍)까지 파견하면서도 속으로는 의병의 궐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이야기로 말하면 이중 플레이(行動)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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