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13)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

의정부 내부 토목국장으로 한성 환경 개선

여기서 내부 토목국장의 위치를 알아보자.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때의 내부는 해방 후에는 내무부, 현재로 보면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부서이나 토목국장은 업무의 특성상으로는 국토교통부에 속하는 업무라 할 수 있다. 내아문이 1982년 통리국군사무아문으로 바뀌었다가 1884년 10월 2일 의정부에 합부(合部)되고, 1895년 3월 26일 내부 관제에 따라 설치된 부서이다.

당시 토목국장이면 내부의 대신, 참판, 다음의 직위로 내부의 토목공사·토지측량·토지수용을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궁억 토목국장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오늘날 서울의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 정비이며, 두 번째는 탑골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한성 중심부 도로 정비

당시 한성중심부 일대의 길은 비좁았으며 일부는 구불구불 굽어 있기도 하고 또한 매우 지저분하였다. 외국 사신들이 수시로 오가는 거리로는 너무 볼품이 없어서 정비가 절실했다. 그러나 오늘이나 옛날이나 새로운 변혁에는 반대가 있기 마련이다. 남궁억은 관료와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개화의 고삐를 중단하지 않고 추진하였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다음 자료가 증명해 주고 있다.

서울의 도로망을 정비·확장하기 위한 치도(治道)사업은 갑오경장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의<내무아문훈시(內務衙門訓示(>와 박정양의<도로수치(道路修治)>와 가가기지(假家基址)를 관허(官許)하는 건(件)>등을 기초로 1896년 9월 29일에 마련된 내부령<한성 내 도로(漢城內 道路)의 폭(幅)을 규정(規定)하는 건(件)>이 발포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갑오경장 중 한성부관찰사를 역임하였던 이채연과 내부 토목국장 남궁억 등에 의해 도로 수축 및 청결 사업이 추진된 결과 1896년에는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불결했던 도시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외국인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아울러 서울의 치도사업은 성문 안뿐 아니라 성(城) 밖의 도로에까지 확대되었다.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조성

탑골공원 조성도 순탄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아주 심했다. 쓸데없는 국고 낭비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종로에서 조금만 더 나가도 산과 들이 있어서 구태여 도심 한복판에 공원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탁지부에서 공원 조성 예산을 받아 옛 원각사 터에 탑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남궁억은 유연한 사람이다. 개화파 중에서도 온건개화파에 속한다. 그런 그가 대신들도 집이 헐리는 백성들도 반대가 심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대화와 타협으로 종로 일대 및 육조 앞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였고, 탑골공원을 새로 조성하는 일 등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이 계획을 치밀하게 추진했던 남궁억 토목국장의 열정과 끈기가 주효했다.

내부대신(大臣) 남정철의 농간으로 토목국장에서 면직

이렇게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계획하고 추진하던 남궁억은 1897년 8월 27일 면직되었다. 승진이나 전직이 아니고 ‘면직’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세, 즉 독립협회파와 수구파 사이의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당시 남궁억은 토목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독립협회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처음에는 관민이 함께하였지만 차츰 정부를 향하여 비판하게 되자 관료들은 협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남궁억은 토목국장에서 해임되기 전 해인 1896년 2월 12일 강원도지방 선유사로 임명된다. 다시 말하여 토목국장으로 일하면서 선유사의 일을 감당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에서의 우위를 확보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종과 명성황후가 움직이니까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이에 고종은 춘생문 사건을 계획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듬해 2월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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