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삼포’는 어딜까?
성포교를 건너면서 ‘삼포(森浦) 가는 길’이 생각났다.
황석영은 ‘삼포 가는 길’을 통하여 1970년대 산업화가 초래한 고향 상실의 아픔을 형상화해 냈다.
부랑 노무자 ‘영달’과 ‘정씨’가 눈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귀향한다. 도중에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 떠돌이로 살아가는 처지를 밝히며 삶의 밑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확인하게 되고, 세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특히,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그토록 그리던 ‘정씨’의 고향 삼포가 개발 사업으로 인해 송두리째 사라진 사실을 통하여 부랑 노무자의 비애가 밀도 있게 그려진다. ‘영달’은 부랑 노무자로 일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인물이고, ‘정씨’는 옥살이를 하면서 목공·용접·구두수선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으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 삼포를 찾아간다. 우연히 만나 동행이 된 ‘영달’과 ‘정씨’가 술집에 들렀을 때, 주인은 ‘백화’란 작부를 찾아 주면 만 원을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눈길에서 만난 ‘백화’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는 ‘백화’를 도와 여비를 나누어 차표와 빵을 사 준다. 감격한 ‘백화’는 자신의 본명을 알려 주고 그들 곁을 떠난다.
1970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농민은 뿌리를 잃고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하며 일용 노동자로 떠돈다. 이러한 상황의 황폐함과 궁핍함이 ‘영달’과 ‘정씨’ 같은 부랑 노무자, ‘백화’ 같은 작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면서 시대적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정씨’에게는 이제 그 옛날의 아름다운 삼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육지로 연결된 삼포는, 그가 떠나고자 했던 도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산업화 된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삼포는 그에게 있어 오랜 부랑 생활을 끝내고 안주할 수 있는 곳, 곧 정신의 안주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씨’에게 있어서 삼포의 상실은 곧 정신적 고향의 상실을 의미하며, 그 순간 ‘정씨’는 ‘영달’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랑자가 되고 만다.

그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할까?
다들 고향을 찾아갔을까? 그들이 찾은 고향은 어디일까?
‘성포교(성산과 삼포를 잇는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본능적, 생리적, 정신적 안식처인 고향을 생각해 본다.
‘삼포’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다. ‘삼정포(三汀浦)’의 바깥쪽이 되므로 ‘외삼정포’ 또는 ‘외삼포’라 부르는 곳이다.
어머니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삼포에는 배를 타고 건넜던 강이 있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밭두렁 논두렁을 뱀처럼 돌아가야만 했던 곳이다.
한때는 가마니기계를 놓고 가마니를 짜던 대문간과 봉당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사촌들, 백발의 외할머니가 계셨던 곳이다. 그 옛집이 고스란히 푸른 시간과 함께 남아있다.
그 시간 속에 자리하는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산으로 떠나고 텅 빈 집을 우두커니 지키고 계셨던 외숙모도 몇 년 전에 산으로 떠나갔다.
혼자 떠나가는 죽음은 개별적이어서 슬프다.
그리고 유산처럼 남겨진 그리움과 어둠만 깊은 집이 낯설다.
이번 기회에 가보니 낯설다. 집이 낯설고 사람이 낯설다.
사람이 떠나면 모두가 낯설어지는가?
아님 내가 너무 멀리 있어 낯설어졌던가?
아무튼 낯선 나를 만나면서 어떤 그리움이 남아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리움의 뿌리가 길이었다는 것을 안다. 길을 찾지 못하면 어떤 그리움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고 고향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외삼포’- ‘건금리’와 ‘대평동’, ‘옻남여울’을 병합하여 편자 같이 ‘내삼포(수라상마을)’를 에워 싸고 있는 마을이지만 이번 기행은 ‘건금리’를 중심으로 돌아본다.
‘건금리’는 ‘버덩말(구렁말)’, ‘안말’, ‘수리께’를 아우르는 마을이다.
‘버덩말’은 ‘사창고개’ 마루에서 능선을 따라 화촌중학교로 넘어가는 ‘토끼울’ 이편이 된다.
‘버덩말’은 아름드리 밤나무 빼고는 논도 밭도 아닌 구렁이었다. ‘성산’이나 ‘야시대’, ‘백이동’에서 배를 타고 ‘버덩말’을 지나 ‘토끼울’을 넘어 화촌중학교를 다녔고, ‘안말’ 아이들은 ‘꼬부랑고개’를 넘어 삼포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길은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지만 흔적이 남아 있고, 특히 ‘서낭당고개’에서 떡도 얻어먹던 일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버덩말’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안말’로 이사를 나온다.
‘안말’은 집들이 다문다문 들어서 있고 제법 논을 일구며 사는 동네였다.
안말은 ‘된봉’ 아래가 된다. ‘산초울마을’의 체험관과 외삼포리경로당, 마을회관이 자리 잡은 곳이다.
지금 산초울 발아현미공장이 들어서 있는 곳 아래쪽에는 ‘샘통’이 있었고 ‘안말’에서 ‘버덩말’로 가는 구렁에는 샘이 있어 빨래터로 동네아낙들이 모였다.
지금은 지하수를 파거나 ‘누치소’에서 물을 끌어올려 물이 흔하지만 ‘건금리’ 너른 땅에 물이 없던 시절이라 샘만 나면 마을 아낙들이 모여 빨래를 하였다.
‘안말’에는 ‘서울댁’이라는 고댁(古宅)이 있다. 현재 박영익씨 소유의 집이다. 이 댁의 안주인은 청정하고 푸근한 성품을 가진 분이셨으며 그의 부친은 구한말 당상관을 지낸 통정대부장례원전사(通政大夫掌隷院典祀) 이기호씨였다.
이기호씨는 구한말 급변하는 세계판도와 외세의 압력, 조정의 상황이 복잡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홍천 삼포’로 내려와 침통한 마음을 달래며 지냈다. 그러던 중 ‘누치소’ 보막 공사에 심혈을 기울이다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이 와중에 부인을 잃고 또 혼기가 찬 큰딸을 어쩔 수 없이 ‘버덩말’의 춘천박씨 가문으로 시집을 보낸다. 당시 춘천박씨의 가세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것을 알고 ‘안말’에 고택을 구입하여 분가를 하게 한다.
이때부터 ‘안말 서울댁’이라는 댁호를 얻는다.
‘누치소’는 한여름의 천렵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부자들을 잡아먹는 소라고 한다.
‘건금리’의 ‘안말’, ‘버덩말’, ‘윗말’은 물줄기만 트면 문전옥답이라는 매력을 느끼고 서울의 부족들이 ‘누치소’에 보를 막기 시작하였는데 아무도 성공을 하지 못했다. 다만 사람의 힘으로 고작 몇 다랑구지씩 땅을 일구는 동안 재산을 다 날리거나 병이 들어 죽어갔다고 한다.
‘누치소’의 마지막 투자자가 된 이기호씨도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그 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식량 자급자족의 시대를 연다는 구호 아래 1957년경 토지개간사업과 함께 누치소에 ‘양수장’을 설치하는 수리시설이 시작되고 ‘안말’ 둔덕까지 물길이 닿게 되자 그야말로 문전옥답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그러나 ‘삼포’와 ‘성산’을 잇는 길은 나룻배뿐으로 지척을 두고도 먼 길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면에서 운영하던 배도 말만 배였지 아무런 지원도 없고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낡은 배였다고 한다.
그 배 관리는 삼포 이장이 하였는데 새마을사업으로 다리를 놓기 전까지 강을 건너다녔던 배에는 많은 애환이 숨겨져 있었다.
박민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장은 물이 새는 낡은 배를 새로 건조해줄 것을 면사무소에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들은 척도 안하고 소 닭 보듯 했다 한다. 할 수 없이 면장과 경찰지소를 찾아가 목재를 쓸 나무를 베겠다며 통고를 하고, 누치소 ‘문바위골’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산림녹화사업으로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영림소의 산림간수가 찾아와 민원이 발생하여 같이 가자는 통보를 받고 경찰서로 끌려 갔다한다.
결국 조서를 받고 벌금 9천원을 물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 고초를 겪고 마지막 배가 만들어지고 진수식을 하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얼굴 내밀만한 사람들은 다 찾아와 성대하게 진수식을 하였다고 한다.
그 배와 함께 삼포의 뱃사공 장만섭(작고)씨는 다리가 놓일 때까지 나룻배를 띄웠다고 한다.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기록사진이 남아있지 않을까? 몇 번 전화를 했지만 허사다. 아니 공개조차 난망해 했다. 역사를 찾는 일은 쉬운 게 아니구나!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섶다리를 놓았다. 배는 몇 년 동안 강을 건너다녔다. 장마가 나면 배는 ‘수리께(수리포, 수리계, 구석건금리)’까지 떠내려 갈 때가 많았다.
그 후 새마을사업으로 ‘삼포’와 ‘성산’을 잇는 다리가 놓이고 배는 사라졌다고 한다.
‘안말’은 ‘윗말’과 ‘아랫말’로 경계를 짓는데 그 경계는 ‘성지(승지)골’이다. 성지골은 골이 깊지만 비가 와야만 물이 흘렀다. 성지골을 따라 ‘된봉’으로 오른다.
‘된봉’은 마을의 주산이다.
‘새물동산’이라는 작은골에서는 맑은 샘이 났으며 ‘웃뭇골’을 따라 ‘쇠삐뚜리’, ‘칡삐뚜리’를 지나 ‘무레이’로 넘어가기도 했다.
‘사창고개’를 넘으면 56번 국도가 나온다. 고개를 넘으면서 오른편 학교 쪽으로는 ‘내삼포’이고 왼편쪽으로는 ‘외삼포 옻넘여울’이다.
‘건금리(乾金里)’는 둔덕을 이루는 너른 구릉지대다. 물이 없어 땅이 메말라 하늘을 바라만보고 살아야하는 곳이라 ‘김기미’라 부르기도 했다.
다리가 없어 배를 다고 건너야 했기에 성산과는 가깝고도 먼 이웃 이었지만, 이 너른 강에 다리가 놓인 것은 새마을운동의 결과이다.
지금 놓인 다리 아래 남아있는 낡은 시멘트 다리이다. 1974년에 놓은 다리로 마을의 숙원을 풀었으며 새마을의 성공사례로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1964년의 경지정리로 ‘천수답’의 ‘건금리’와 ‘대평동’이 문전옥답으로 바뀐다.
강원도1호가 된 ‘대평동’의 개간사업은 ‘북창’ 앞강에서 물줄기를 끌어 오면서 건금리의 웃말과 아랫말, 수리께(수리포)도 옥토로 탈바꿈 하였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지금도 ‘누치소’로 이어지는 수로가 건금리를 지나 대평뜰까지 이어진다.
황석영의 삼포처럼 삼포는 새로운 고향이다. 정신적 안식처로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라 따뜻한 삶이 살아있는 곳이다.
성포교 다리를 건너 ‘누치소’로 올라갔다.
들녘 한가운데를 지난다. 논에는 듬성듬성 모판을 꽂아놓았는데 모판에는 빨간 알들이 붙어있다. 자세히 보니 우렁이 알이다. 지난해까지는 홍천의 명품 쌀 탑라이스 재배단지였으나 올해는 우렁이농법으로 바꾸었다.
우렁이농법은 우렁이의 먹이습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이다. 유기질 비료를 사용하고 우렁이를 이용해 잡초를 제거하며 이들이 배설한 배설물을 비료로 이용하는 자연친화적인 농법이다.
특히 화촌농협과 농협중앙회 주선으로 아시아나항공사와 일사일촌을 맺으면서 우렁이농법은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KBS의 ‘6시 내고향’에 백년가약마을로 전파를 타면서 산초울마을의 브랜드 가치는 높아졌고 강원도가 주관하는 새농촌건설운동 우수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누치소’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천렵을 하던 강가다. 천렵을 하기 전날 저녁에 ‘주낙(‘줄낚시’란 뜻으로 한 줄에 여러개의 낚시를 달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놓고 아침 일찍 나가 자리를 잡고 솥을 걸었다. 그리고 나서야 지난밤에 놓았던 주낙을 거둔다. 주낙에는 메기가 많이 올라오고 재수 좋은날은 쏘가리도 몇 마리 걸려 올라왔다. 지금은 보기 힘든 자라가 걸릴 때도 있었다. 어죽을 끓이는 동안이면 동네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한 그릇씩 어죽을 비우고 나면 ‘문바위골’에 올라가 ‘우산바위’ 그늘 밑에 누워 봄부터 쌓인 농사일의 노독을 풀어냈다.
그때의 ‘문바위골’은 온데간데 없고 차돌광산의 개발로 흉물스런 잔해만이 남아있다.
문바위골 아래는 ‘구절터’다. 문바위골에 있던 절이 이곳에 있었다 한다.
‘독박골’은 구절터 아래 골짜기다. 강에 닿아있는 골 어귀에는 ‘덧바위’가 있고 마을사람들이 치성을 드렸던 ‘치성터’가 있었다.
‘버드나무골’을 지나 내려오면 ‘양수장’이다.
‘삼형제바위’가 ‘문바위골’ 어귀부터 ‘양수장’까지 이어지고 그 아래 ‘누치소’가 하늘빛을 담는다.
물과 산과 기암괴석이 절경이었다는 이곳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성산과 외삼포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옛날 사진도 마땅한 자료도 없이 구전으로 남아있는 이야기로 누덕누덕 이어갈 수밖에 없다.
외삼포와 성산 사이를 흐르는 화양강의 나루터는 제방 속에 묻혀있다. 지금 건금리 3길을 따라 200여m 되는 곳이다. ‘뱃터거리’라 불렀다. 강 건너 성산은 민박집 있는 곳이 뱃터였다.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고 소문난 개장국집이 있었다. 가문의 대를 이어 뗏목을 띄웠던 마지막 뱃사공 ‘장만섭’씨(사망)도 1974년 다리가 놓이면서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떼버덩이었던 들녘은 논으로 바뀌고 ‘된봉’ 아래 터를 잡은 ‘건금리’ 사람들은 산초울마을 브랜드로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우렁이농법과 산초울 발아현미로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홍천군 최초로 농촌장수마을로 선정되고 아시아나항공사와 맺은 일사일촌(一社一村)의 돈독한 정과 KBS의 백년가약마을로 이어지는 산초울마을의 이미지는 강원도 새농촌건설운동의 우수마을로 선정된다.
산초울이란 ‘산과 깨끗한 풀과 맑은 물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마을’이라는 뜻으로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사는 고향의 이미지를 뿌리내렸다.
또한 산초울마을은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곳이다. ‘건금리’ 아랫말 논 한가운데 이영종씨 농가 앞에 세워진 ‘이사규 충신문 및 처 완산이씨의 열녀문’이 있다.
충신 이사규는 병자호란 당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갈 때 이사규가 자진해서 청에 동행했는데 청나라 용골대가 세자에게 무례를 범하자 이에 거칠게 항의하다 목을 베이게 되었고, 머리만 말위에 실려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에 부인 완산이씨는 엄숙하게 장사를 지내고 3년 상을 치른 후 남편의 영혼을 따라 자결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완산이씨 열녀문을 세웠다고 한다.
이사규 충신문 및 처 완산이씨의 열녀문은 충절과 정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현판과 신표와 집기 등은 지역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왼쪽에는 세월만큼 아픈 상처를 간직한 소나무가 늘어져있고 뒤편으로는 축사가 있다.
아쉽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안내판 하나 없고 길에서는 보이지 않아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버덩말’에는 육묘장과 늘푸른 한우농가가 자리한다. ‘사창고개’에서 화촌중학교 뒷고개인 ‘토끼울’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동서고속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때는 아름드리 밤나무 밭이었던 이곳이 너른 버덩이 되고 동서를 잇는 길목이 되는 것이다.
‘버덩말’을 돌아내려오면 ‘수리께(수리포)’다. 수리포를 돌아 내려오면 ‘도랑소’다. 도랑소도 피서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대평리’로 들어서는 길은 동산의 바위벼랑에 막혀 갈 수 없다. 수로를 따라 가든가 ‘토끼울’로 돌아가야 한다.
수로는 길이 아닌가? 물처럼 ‘대평리’로 들어섰다.
글·사진 허 림(시인)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