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에는 제비가 많다. 공기도 좋고 물이 좋아 지붕을 맞댄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쉴 새 없이 날아든다. 제비가 찾아오는 마을에는 인심이 나고 풍년이 든다했던가?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자작고개로 올랐다. 시장을 보려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올라야 한다. 바로 자작고개가 그런 곳이다. 또한 동학군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항전을 펼친 곳이다.
서석면 면사무소 앞을 지나 뒤쪽 언덕배기 길.
고갯마루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우뚝 솟아 있다. 1976년 새마을 정비사업 중 고갯마루에서 유골이 나와 조사한 결과, 동학군의 유해로 판결, 이듬해 마을 사람들이 쌀 한 말 씩을 모으고 홍천군에서 보조를 해 건립한 것이다.
쨍쨍한 햇빛이 화살처럼 내리꽂는 두시쯤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향하여 흰색의 탑신이 하늘을 향하여 우러르고 있었다.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 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정두수 작사 이유림 작곡 주현미가 부른 자작고개의 첫 소절이다.
‘자작고개’ 혹은 진동고개, 지렁리고개, 지령고개, 서낭당고개, 진등이고개로 부르는 이 고개는 덕밭재(덕바치)에서 진등모퉁이까지 내리뻗은 진등산을 넘는 길인데, 이름만큼 한이 얽힌 고개이다. 진등모퉁이는 도로확포장공사로 허리가 잘렸고 일부는 논이 되었다.
농협경제센터가 있는 곳은 진수륵인데 지금은 새말이라 부른다. 진등 산 밑으로 동학사적 길이 고갯마루까지 이어진다.
성황당고개는 현하에서 지렁리(풍암시장)로 넘는 고개로 오래 전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지금은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에는 성황당 앞으로 길이 나 있었고 호랑이가 인가에 내려와 해를 끼칠 정도로 험한 고개였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이 고개 마루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지신과 산신께 제를 올렸다 한다. 그 후로 각종질병과 맹수들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하고 이런 재앙을 막는 영(靈)이 서린 곳이라 하여 지령리로 부른다.
진등은 현아와 지렁리 사이 긴 등 같은 능선을 가리킨다. 이 능 마루에 오솔길 같은 고개가 자작고개이다. 진등과 자작고개는 동학군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 홍천지역의 동학운동에 대하여 살펴봐야 한다.
고종 31년(1894)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가 원인이 되어, 동학접주인 전봉준이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94년 9월18일(음) 해월 최시형 선생이 전국 교인에게 반봉건 반외세의 총기포령을 내리자 홍천 지역에서는 차기석(車箕錫), 심상현(沈相鉉), 오창섭(吳昌燮)등이 기포를 하였다.
차기석 대접주는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척왜양창의 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사실상 강원도의 총수령으로 홍천을 비롯하여 평창·영월·정선·강릉 등지의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이에 앞서 9월 중 홍천에서는 고석주(高錫柱)·이희일(李熙一)·신창희(申昌熙) 등이 이끄는 동학군 수백 명이 접을 설치하면서 혁명의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동학혁명 당시 홍천 지역의 주요 전투지는 내촌면의 물걸리 동창, 화촌면 장평, 서석면 풍암, 내면 원당·청도·약수포 등을 들 수 있다.
기포령을 전해들은 차기석 대접주는 박종백 접주와 더불어 동학군 1천여 명을 이끌고 보은 장내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맹영재의 민포군에 길이 막혀 홍천으로 되돌아와 내촌면 물걸리로 진출하였다.
차기석은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같은해 10월13일 야밤을 이용하여 동창(東倉-내촌면 물걸리)을 습격하여 불태우면서 혁명의 서막을 알렸다. 동창은 강원내륙의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했다가 비가 많이와 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보내던 곳이다.
기세를 올린 동힉군은 영월·정선 지역의 동학군과 연합하여 대관령을 넘어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10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이 지역의 보수 지배세력은 동학군에 대한 적극적인 반격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홍천과 가까이 있는 지평의 감역을 지낸 소모관(召募官) 맹영재(孟英在)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으로 진격하였다.
동학군과 민보군의 첫 만남은 10월 21일 화촌면 장야촌(장평리)에서 이루어졌다. 이 첫 전투에서 동학군은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솔재(솔치)와 동막산·고양산을 넘어 서석면으로 후퇴하였다.
풍암리 전투는 10월22일부터 시작되었다. 동학군은 풍암리의 작은 구릉이며 전략적 요새인 이곳에 진을 치고 군열을 정비하는 한편, 민보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진등(동학군이 진을 쳤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은 천연적인 군사적 요충지로 뒤로는 아미산과 고양산이 둘러싸여 있으며 앞으로는 홍천 인제 횡성 내면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장야촌(장평)에서 승전을 거둔 맹영재의 민포군은 속초리(홍천군 동면)를 거쳐 풍암으로 진격해왔고, 관군은 홍천 방면의 솔재와 횡성 방면의 먼드랫재의 두 갈래로 진격해 들어왔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하여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면 저들이 총에서 총알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며 싸웠다. 숱한 농민군들의 식사를 해결하려고 소를 잡고 가죽을 벗겨 네 귀퉁이를 말뚝에 묶어놓고 불을 지펴 밥을 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맹영재의 민포군과의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동학군의 희생은 엄청났다. ‘총으로 쏘아죽인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 홍천군 서석일면은 인종이 영절(永絶)하였다‘라고 보고 할 정도였다.
‘고종실록’에는 ‘… 소모관 맹영재(召募官 盟英在)가 행군하여 홍천 장야촌에 이르러 비적(匪賊) 30여명을 쏘아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서석면에 이르니 비적 수천여명이 흰 기를 세우고 진을치고 모여 있기에 총을 쏘며 접전하였는데 사상자는 그 수를 알 수 없다 …’고 기록되어 있다.
증언에 따르면 이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일가친척 동네사람들 수는 800여 명에서 1,0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풍암리 일대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30여 호나 있었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숨겨 되는데, 곳곳에서 추격과 접전을 벌인다. 미약골과 상비, 생곡리, 수하리에 얽힌 동학군의 비애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
‘서낭당고개’가 ‘자작고개’로 불리게 된 것도 풍암리 전투 이후의 일이다. 동학군이 진을 쳤다 하여 진등이라 부르게 되었고, ‘자작고개’에 대한 유래 또한 분분하지만 모두 동학농민군 희생의 산물이다. 그 하나는 ‘동학 난리’때 사람들이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여 붙였다고 하고, 또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하여 붙였다고도 한다. 더욱이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 시체를 진등에 묻었는데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자작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위령답 주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옛날에는 돌배나무도 있었는데 자작고개 전투 후에 없어졌다고 한다. 그 돌배나무는 관군들이 동학군의 상투를 꿰어 매달아놓고 문초를 하던 곳이라 한다. 또한 성황당 뒤에는 삼백년 넘는 엄나무가 있는데 매년 정월에 돼지머리와 백설기를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면서 ‘동학군의 영령을 위로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서석에는 그날이 악몽을 기억하며 동학혁명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동학군 토벌작전은 11월10일부터 시작된다. 특히 내면의 동학군 토벌작전은 네 갈래로 진행되었다. 서남쪽은 강위서(姜渭瑞)가 보래령(홍천 내면과 평창 봉평을 잇는 해발 1,324m의 고개)을 넘어 홍천 의병 허경(許坰)과 합세하여 자운포(내면 자운리)를 공격하고, 남쪽으로는 양양의 민보군 대장 이석범(李錫範)과 박동의(朴東儀)가 연합하여 운두령(홍천 내면 자운리와 평창을 잇는 고개), 원당리, 청도리, 약수포로 이동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이석범의 동생인 이국범(李國範)이 관군을 이끌고 신배령(강원도 홍천군 내면 조개동에서 강릉시 연곡면 가마소로 넘나드는 고개) 을 넘어서, 서쪽으로는 이석범의 부종관인 김익제(金翼濟)가 응봉령을 넘어 내면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강위서는 흥정3리(평창군 봉평면)까지 진출하였다.
이틀동안 전개된 이 공방전에서 차기석 대접주를 비롯하여 접사(接司) 박학조(朴學祚), 손응선(孫應先), 집강(執綱) 박석원(朴碩元) 등이 체포되었으며, 접주(接主) 위승국(魏承國), 김치귀(金致貴), 임정호(林正浩), 접사(接司) 심성숙(沈成淑), 성찰(省察) 오덕현(吳德玄), 권성오(權成五) 등을 비롯하여 100여명이 포살되는 등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차기석 대접주는 강릉부로 압송되어 11월22일 강릉 관아 교장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창에서 기포된 강원도 홍천의 동학혁명은 막을 내렸으나 일제의 토벌작전에서 살아남은 동학군은 깊은 산중에 은신하거나 신분을 감추면서 지내는 한편, 끊임없는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등 후일을 도모하였다.
강원도에서 첫 기포를 한 동창의 현 행정구역은 서석 풍암리가 아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이다.
참고로 홍천동학운동에 대한 문헌은 갑오실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去月二十二日辰時 到府 秘甘內節該接洪川縣監所報 卽東徒今月十三日夜 突入東倉 放火倉舍 魁帥車箕錫接主朴鍾伯 率其同黨壇殺人令於江陵地是乎矣(東匪討錄) 卽去十月二十一日行軍 到洪川長野村 砲殺匪類三十餘名 翌日轉向瑞石面 卽匪徒數千餘名 揷立白旗 結陣屯聚衣 放銃接戰以丸中殺者 不知其數(甲午實記)

서석의 골짜기를 돌아들면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동학혁명과 관련이 깊은 마을이 많았다. 홍천강의 발원지인 마당대기와 고분대월, 상비, 먼드랫재 등지에서도 피비린 전투가 있었다. 아직 규명되진 않았지만 역사가 간직한 시간 속에는 꼭 풀어주어야 할 아픔이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더 컸고 사람답게 살고자했던 동학농민혁명 영령들의 몸부림을 나는 자작고개에서 서늘하게 느끼고 서 있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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