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68]]

과거의 회상이 역사를 떠올리게 되고, 과거 회상이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어제라는 한 시점에 서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되돌아보며 내일을 설계하는 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일직선상에 놓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관조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역사는 발전이기 때문이다. 가을 풀이 소복하게 우거진 전조의 절이었는데, 지금은 밝은 비석에는 선비의 글귀만 남아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弘慶寺(홍경사) / 옥봉 백광훈 
가을의 풀 속에 전조의 절에서
비석에 남겨있는 학사의 문구에
유수는 천년을 가고 지는 해 구름보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추초전조사 잔비학사문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천년유류수 낙일견귀운

천년 세월이 가는 것은 흐르는 물만 있을 뿐이니(弘慶寺)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가을 풀이 소복하게 우거진 전조의 절이었는데 / 지금은 밝은 비석에는 선비의 글귀만 남아있구나 // 천년 세월이 가는 것은 흐르는 물만 있을 뿐이니 / 지는 해에 떠가는 구름만을 바라본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홍경사에서]로 번역된다. 홍경사는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에 있었던 봉선홍경사이라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에 잘 나와 있는바와 같이 1026년에 최충(崔冲)이 지었던 봉선홍경사기를 새긴 비가 국보 제7호로 지정된 문화재임을 알고 나면, 시인의 시상은 족적의 그림자를 밟고 있어 보인다.

시인은 전조인 고려시대부터 이 절이 있고, 최충이란 대학자의 손때가 묻어 있는 비문이란 선경의 시낭詩囊을 매만지고 있다. 가을 풀이 소복하게 우거진 전조의 절이었는데, 지금은 밝은 비석에는 선비의 글귀만 남아있다는 시상이다. 선비의 글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해동공자로 알려진 대학자를 뜻하고 있다.

화자는 시적인 심회는 이젠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멋을 부린다. 천년 세월이 가는 것은 흐르는 물만 있을 뿐이니, 하염없이 지는 해에 떠가는 구름만을 바라본다고 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예나 지금이나 흐르는 것은 물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시인의 푸념 한 마디는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하늘뿐이라는 허탈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풀 우거진 전조의 절 밝은 비석 선비 글귀. 천년 세월 물만 같아 구름만을 바라보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으로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36세인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의 천거로 백의제술관이 되어 시재와 서필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했던 인물이다. 이후 명성을 얻었고, 백광선생이라는 칭호를 얻으면 삼당시인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秋草: 가을 풀, 前朝寺: 전 조정의 절. 곧 여기서는 고려를 뜻함. 殘碑: 오래된 남은 비석. 學士文: 학사의 비문. 선비의 글. 여기선 최충의 글씨를 뜻함. // 千年: 천년. 오랜 세월. 有流水: 유수만이 있다. 落日: 해가 떨어지다. 見: 보다. 歸雲: ‘시인은 구름이 돌아가는 것’을 보다는 뜻임.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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