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607)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심사위원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심사위원

지난달 24일 5박 6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을 다녀왔다. 베트남은 동남아의 중심지대에 위치한 사회주의국가로 우리나라에 비해 국토가 3배 인구는 2배 정도다. 남북의 길이가 약 3천리이고 30%가 평야이며 70%는 산악지대다. 수도는 북쪽 하노이시(구 월맹 수도)고 남쪽의 호치민시는 과거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없애고 호치민으로 바꿨다. 이번 여행은 베트남의 해안도시이고 중심이 되는 다낭과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관광지와 과거 남북으로 전쟁을 하던 격전지를 탐방했다.

1973년 월남에 패망하고 월맹이 승리하자 미국과 한국 파병부대는 철수를 했고 월맹은 베트공이라고 해서 게릴라전과 월맹의 정규군이 투입돼 남쪽의 월남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신형무기와 엄청난 군비를 투입하고도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고 철수하자 월남은 곧바로 월맹에 점령당했다. 대통령은 외국으로 피신하고 각료와 군장성 및 고급장교들은 인접국이나 미국 등으로 떠났다. 그 당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로 부패가 극심했다. 고위층은 고위층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나라가 온통 부패로 썩을 대로 썩었었다고 한다.

월남이 망하던 날 대통령은 헬리콥터로 금덩이를 싣고 떠나고자 했으나 너무 많아서 다 싣지를 못했다는 얘기도 있다. 민간인은 민간인대로 베트공과 내통하고 한집안의 가족도 밤과 낮이 서로 다른 생활을 이뤘다고 한다. 즉 월남군 형이 있고 베트공 동생이 있으며 월남 공무원이 있으면 월맹 군인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 신형무기가 공급되면 내일 아침이면 그 무기가 베트공한테 가 있었다고 한다. 극심한 부패로 결국 망국의 길을 걷고 말았다.

베트남은 세계 1차대전 직후 프랑스의 점령으로 백년 이상 지배를 받았다. 그전에는 중국의 침략도 받았고 이웃인 캄보디아와 잦은 전쟁을 했다. 프랑스 식민지 때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어 프랑스를 이기고 통일하려고 하자 미국이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우려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월남을 대폭 지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현대 무기와 많은 군비를 들여 전쟁을 했으나 좋은 성과를 못 거뒀다. 1965년 미국은 한국에 참전을 요청했고 한국에서는 간호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보냈다. 이때 첫 선발로 간 간호부대는 홍천읍 결운리에 있던 야전병원에서 훈련을 거쳐 차출됐다. 그 후 공병대가 파병되고 이어서 전투부대로 맹호사단이 선발됐다. 역시 홍천에 주둔했던 보병사단으로 첫 사령관에 채명신 소장이 파병부대장으로 참전했다.

한국군은 미군과 같이 7년여 동안 참전해 철수할 때까지 32만여 명이 파병됐고 전사자가 5천여 명 부상자와 실종자 등 1만여 명의 손실이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인명의 사상자가 많이 났지만 국가의 이득은 엄청났다. 파월장병이 받은 월급은 미국 달러였으나 우리 국군에게는 그 달러를 환불해 원화로 주고 달러는 국가의 수익으로 처리해 경제발전에 초석이 되는 데 썼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만큼 잘 사는 것도 파월장병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고엽제로 인한 병마 부상자들의 애국정신이 없었다면 경제부흥도 힘들었을 것이다.

6.25 한국전쟁 직후 월남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다. 전쟁 때 월남은 군수물자로 워커(군인 신발)와 안남미 쌀 등을 원조했던 나라다. 돌이켜보면 일본은 제2차대전 때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후 전쟁의 피해복구를 엄두도 못 냈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미국이 참전해 일본에 병참기지를 만들어 한국에 가져왔다. 이때 일본도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월남은 지금 경제부흥에 매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의 기업참여가 대단하다. 특히 삼성이나 SK LG 같은 대기업들이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무역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무역 교역량이 중국 다음으로 많다. 비록 정치는 사회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는 베트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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