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3)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어려운 살림에도 선생을 공부시킨 어머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궁억의 어린 시절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공부는 하고 싶었으나 서당을 다니기도 어려웠다. 어머니 홀몸으로 세 남매를 키웠는데 형편이 어려워 끼니조차 잇기가 쉽지 않았다. 삯바느질을 하였으나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배부르게 먹이고, 하고 싶은 공부를 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큰 사랑

서당에 가고 싶어 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 미어지지 않았겠는가. 무관 출신 집안이지만 학자적 자질이 넉넉하고 재주가 비상한 아들을 보면서 ‘부모를 잘못 만나 저 고생하는구나!’ 하고 매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하여 여섯 살 때인 1968년부터 이 사과(司果,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정6품 관직)댁에 놀러 가서 마당에서 글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며 동냥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을 본 어머니가 1974(12살)년에 이 과수 댁에 부탁하여 겨우 ‘어깨 넘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어깨 넘어 공부란 정식으로 공부하는 친구가 훈장에게 공부하는 것을 보고 뒤쪽에 앉아서 조용히 스스로 공부하는 것으로 어려운 살림에 그 정도의 공부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천자문을 떼고 사서삼경을 공부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입학한 것은 아니지만 한문 사숙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남궁억에게는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성실한 데다가 어머님의 무한한 자식 사랑과 정성으로 가능했다. 이것은 남궁억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전환점이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선생은 천자문을 다 떼고 무제시(無題詩)를 읽었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이 사과 댁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면 공부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는 길은 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양반이라 하더라도 공부하여 선비가 되지 못하였다면 농사를 짓거나 다른 잡(雜)일을 하여야 했을 터인데 어려서부터 총명한 남궁억에게 어머님의 열정으로 공부의 길이 열린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니 어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겠는가?

어머님은 아들을 키우는데 몇 가지 마음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첫째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키워야 하였다. 제멋대로 언행(言行)을 하는 아이로 기른다면 분명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속으로는 사랑이 넘쳐도 겉으로는 엄격하게 가르쳤다, 아들이 여리게 자라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 번째는 아들이 올곧게 자라려면 독립심이 강하도록 키워야 한다는 점이 배려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머님 교육 방침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 선생을 곧고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하였다.

16세에 결혼, 삼 남매를 두다

남궁억은 16세 되던 해인 1878년 세 살 아래인 남원 양씨 혜덕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는 1994년에 발간된 함열남궁씨 족보 제2권 교리공파(校理公派) 병편(丙編) 343쪽에 “남궁억 선생의 배(配) 남원 양씨 1866년 9월 13일생(生), 1937년 정월(正月) 22일 졸(卒)”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궁억이 태어난 정동 왜송골에서 아들 남궁염(南宮炎)도 태어났다. 부자가 생가(生家)가 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님 두 분에 대한 출생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남궁억의 생가는 나중에 배재학당 운동장 터가 된다.

남궁억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어렵지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치고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통역관 양성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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