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2)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소년기 남궁억의 삶과 당시의 국내외 정세

남궁억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매우 희소하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것이 ‘김세한’이 1960년도에 저술·출판한 『불굴의 얼-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이다, 선생과 관련된 저서에는 공통점으로 나타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용모(容貌)가 청수(淸秀)하고 재질(才質)이 총명(聰明)하였다’라는 점이다.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는 명문가(名門家)의 자손이었다.

선생이 살았던 조선 말기의 정치 상황

조선 후기는 내적으로 왕권이 약화된 세도정치 시기였다. 선생은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고(사서삼경 등), 영어학교를 졸업하고(동문학), 서양 문물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정동 거주, 총해관 근무 및 유럽사찰단의 일원으로 홍콩에서 1년 4개월가량 체류) 개화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억(檍)이요, 자(字)는 치만(致萬)이요 호(號)는 한서(翰西)라고 불렀다. 외교(外交)로 내직(內職)으로 사회운동(社會運動)으로 쇠진해 가는 국세(國勢)를 만회(挽回)해 보려고 전반생(前半生)을 바쳤으나 그 보람도 없이 결국은 을사늑약에 뒤이어 한·일 합방이 되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다가 일이 여의하지 못하매 기독교에 입교하여 우울한 심경(心境)을 위로받으면서 교육으로 농촌운동으로 저서(著書)로 작사(作詞)로서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77년 한평생을 변절하지 않고 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후반생(後半生)을 바쳤다.

서울 정동 왜솔골에서 출생

남궁억은 1863년 서울 정동(貞洞) 왜송(倭松)골에서 무과(武科) 중추부도사를 지낸 아버지 남궁영(南宮泳) 씨와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왜송골은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정동교회와 배재학당 터 사이쯤 되며, 집터는 후에 배재학당 운동장이 되었다. 남궁억은 음력으로 1863년 12월 27일생이니 양력으로는 1864년 2월 초순이 될 것이다.

아버지 남궁영 중추부도사

남궁억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족보에서 보면 철종 임자무과(哲宗壬子武科)에 급제하고 중추도사(中樞都事)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철종 임자년이면 1852(철종 3)년이다. 그리고는 생몰년(生沒年)도 묘소도 확인할 수 없다. 남궁억 선생이 1863년생이니 부친은 10여 년이 조금 넘게 관직에 있다가 사망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정동 왜송골 집터와 그 주변

남궁억의 집터는 나중에 배재학당 운동장이 된다. 그래서 남궁억 집터와 배재학당 터는 같은 곳이다. 사대문 안에 있었고 경복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 궁궐과 육조(六曹)가 가까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외국 영사관이 근처에 있었다. 남궁억 선생이 20대가 되었을 때 세워졌지만 정동교회(1885, 아펜젤러 목사)도, 배재학당(1885, 아펜젤라 목사)도, 이화학당(1886, 스크랜턴 부인) 도 가까운 곳에 있어 서양 사람과 서양 문물과 함께 기독교도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라 안팎의 정세

또 밖으로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통상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거부함으로써 몇 차례의 양요(洋擾)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선생이 태어난 1863년은 고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 보면 미국에서는 남북전쟁(1861~1865), 중국에서는 양무운동(1862~),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1868)이 일어났다. 이런 안팎으로 격동의 시기에 선생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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