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48]

무제無題랄지 우음偶吟이랄지 아예 처음부터 시제를 붙이지 않고 시를 짓는 수가 많았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면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뛰어 넘지는 못하는 수가 많다.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사람은 자동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달지, 철학자는 인간과 윤리적인 철학적인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위와 생각을 한다. 눈에는 발을 내리고 귀에는 문을 닫았으나, 솔바람 개울물 소리도 소란하기만 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無題(무제) / 화담 서경덕
눈에는 발 내리고 귀에는 문 닫아
솔바람 개울 소리 소란하기 그지없고
말 잊고 그대로 보니 마음이 따뜻하네.
眼垂簾箔耳關門    松籟溪聲亦做暄
안수렴박이관문    송뢰계성역주훤
到得忘言能物物    靈臺隨處自淸溫
도득망언능물물    영대수처자청온

마음이 처하는 곳에 따라 저절로 맑고 따뜻하구나(無題)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눈에는 발을 내리고 귀에는 문을 닫았으나 / 솔바람 개울물 소리도 소란하기만 하구나 // 그만 말을 잊고 물성을 물성 그대로 보게 되었으니 / 마음이 처하는 곳에 따라 저절로 맑고 따뜻하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시제를 붙이지 못해서]로 번역된다. 철학자의 한 단면을 다시 보게 된다. 물성의 물성 그대로를 볼 수 있었으니 물성의 진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격물, 즉 사물에 대한 연구가 그의 학문하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방에 천지만물의 이름을 써 붙여 놓고, 그것을 하나하나 연구했다. 그리하여 3년을 연구한 끝에 그는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시인은 나를 잊고 물을 물대로 본다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말한다. 눈에는 발을 내리고 귀에는 문을 닫았으나, 솔바람 개울물 소리도 소란하기만 하다고 했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물아일체에 이르렀음을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화자는 물성은 물성 대로요, 사람은 사람 마음에 대한 어떠한 맑음과 다른 경지를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말을 잊고 물성을 물성 그대로 보게 되니, 마음이 처하는 곳에 따라 저절로 맑고 따뜻하다고 했다. 이런 경지에 다다르니 눈귀를 가려도 바람 소리, 시내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눈엔 발을 귀엔 문을 자연 소리 소란하네, 물성은 그대로 보게 그대로가 맑은 것을’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다른 아호는 복재(復齋)로도 썼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이 전해진다. 박주, 남언경, 민순, 이구, 박민헌, 홍인우, 장가순, 이중호 등 수많은 문인이 있었다. 성리학 뿐 아니라 도가 사상이나 역학, 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한자와 어구】
眼垂簾箔: 눈에는 발을 내리다. 耳關門: 귀에는 문을 닫다. 松籟: 솔바람. 溪聲: 개울물 소리. 亦做暄: 또한 시끄럽기만 하다. // 到得: ~을 얻게 되다. 忘言: 말을 잊다. 能物物: 물성은 물성대로. 곧 본연의 이치대로. 靈臺: 영대, 마음. 隨處: 처하는 곳을 따라서. 自淸溫: 저절로 맑고 따뜻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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