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45]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를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지금 담을 쌓은 벽돌의 원형인 불럭을 만들어 담을 쌓은 장면을 한문으로 소상하게 설명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흙을 한 줄로 놓고 돌을 놓아가는 흙돌담이 있었다. 산울타리보다 더 선호했다. 이 울담을 헐어 내고 중국에서 보았다는 벽돌을 놓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만상은 이 좋은 계절에 많이 놀라고, 세월은 병든 얼굴 속으로 점점 파고들고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天途中(조천도중)[2] / 월사 이정구
만상은 좋은 계절에 놀라고
세월은 병든 얼굴 파고드는데
시작에 나그네 시름 다듬지를 못하네.
物色驚佳節    年華入病顔
물색경가절    년화입병안
覊愁無處寫    詩就不須刪
기수무처사    시취불수산

나그네의 시름을 다 쏟을 곳이야 없겠지만(朝天途中)으로 제목을 붙여 본 율(律)의 후구인 오언절구다. 작가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만상은 이 좋은 계절에 많이 놀라고 / 세월은 병든 얼굴 속으로 점점 파고드는구나 // 나그네의 시름을 다 쏟을 곳이야 없겠지만은 / 시를 이렇게 지어도 다 다듬지는 못하겠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중국으로 사신 여행길 2]로 번역된다. 조선에만 찾아 들지 않고, 조선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봄이 이국에도 있다는 시상을 매만졌던 시인은 전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시상을 펼쳤다. [낡은 주점이 서쪽 언덕에 간신히 붙어 있고 / 강에 걸친 다리엔 수양버들 물에 비친다네 // 봄은 국경 밖 나무를 키우고 / 말 앞에 보이는 산에는 석양이 지는구나]라고 했다. 

이국의 정취에 흠뻑 취했던 시인은 나름으로 느끼는 봄의 소묘에 취하는 모습을 보이더니만, 그만 석양에 취하여만 가는 세월과 늙은 청춘을 생각해 냈다. 만상은 좋은 계절에 많이 놀라고, 세월은 병든 얼굴을 파고든다는 시심을 어루만지고 있다. 세월이 얼굴 속으로 파고들었다면 늙음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생각을 젖었을 때 그 시름을 모두 다 쏟을 길이 없지만, 오직 시적 주머니 한 줌만 만지고 있음을 피력했다. 나그네 시름 쏟을 곳이 없지만, 마냥 시를 지어도 다 다듬지는 못하겠네. 많은 시인의 시를 쓰고 퇴고推敲를 했겠지만, 시지詩紙 위에 직접 퇴고를 거명한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시했음을 비춰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좋은 계절 놀란 만상 세월 속에 병든 얼굴, 깊은 시름 쏟지 못해 지은 詩도 못 다듬고’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치군택민의 이상과 이문화국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던 사람으로 알려진다. 이 점에서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을 보인 셈이다. 장유, 이식, 신흠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物色: 만상. 만색. 驚: 놀라다. 佳節: 좋은 계절. 年華: 세월이 화려하다. ‘세월이 파고들다’는 뜻으로 쓰임. 入病顔 : 병이 든 얼굴. 병색이 짙은 얼굴. // 覊愁: 나그네의 수심. 無處寫: (시름을) 쏟을 만한 곳이 없다. 詩就: 시를 짓다. 不須刪: 다듬을 줄을 모르다. 다듬지를 못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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