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눈[28]

▲민경철시인/화가/사업가/홍천문인협회 회원전 대한육상경기연맹 심판위원
▲민경철시인/화가/사업가/홍천문인협회 회원전 대한육상경기연맹 심판위원

배움이란? 죽을때까지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점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부단한 학습의 과정이다.

필자는 중학생 시절 육상선수를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본교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다니던 고등학교는 고3 전체가 500명 정도로 전교 200등 안에만 들면 연세대나 고려대, 사관학교, 서강대, 성균관대 이상 서울대에도 들어 갈 수준의 학교였다. 지방의 농어촌 전형으로는 의외로 서울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쉬울 수 있지만, 극심한 한국의 교육 붐으로 큰 도시, 특히 서울에서 좋은 서울 내 대학의 입학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입학 후 육상선수로 활동하며 훈련에 몰두했다. 집념과 끈기로 열심이다보니 선수로서의 역량이 많이 향상됐다. 허나 시합에 집중해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하는데다가 각종 경기 참여 등으로 수업을 많이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 선수들이 그렇듯이 그러다 보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교과 성적이 좋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 밖에 없고 나에게는 그것이 또 다른 목마름으로 다가왔다. 평생에 걸쳐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육상 특기생으로 스카우트 됐다. 입학 후, 진로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많은 번민을 하다, 급기야 대학 2년초에는 자퇴를 하게 됐다. 체육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 체육 선생이 될텐데 나는 월급쟁이 체질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담대하게 자퇴를 선택해야 겠다 결론을 내리고 일찌감치 장사에 뛰어 들어 하나 하나 스스로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두 아들도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대회에 참가해 많은 상장을 받았었다. 80~90%는 서울대회로 참여 인원이 적지 않았다. 그 당시 서울의 국민학교 학급 인원은 한 반은 보통 5~60명 정도, 10개 반 정도 전체 5~600명, 전교생은 보통 몇 천 명 정도로, 상장을 받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필자의 자기 자랑은 아니고 현실이 그러하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어쩔 수 없는 부연 설명이다. 

작은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다음 해부터 미술에 대한 미련으로 장사를 마치면 미대로는 한국 최고로 인정받는 홍익대학교에 가서 8년간 야간 미술공부를 했다. 목공예 공부로 야간 목공예 강사로 뛰기도 했다. 그렇게 원하는 바를 하나씩 이루어 갔다. 평생 술, 담배를 안했으니 시간은 넉넉했다.  그 다음에는 운동과 직결된 분야인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이어서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등도 차례로 수료하고 경매상담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하나님께서 재주도 많이 주셨고, 근면 성실 끈기 인내 추진력까지 덤으로 주셔서 공부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이처럼 필자는 평생을 배우는데 시간을 할애해 공부를 해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공부를 지속하도록 계획을 세워 실천하려한다. 

교육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교육학적으로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 그 개념은 인간형성의 과정이며 사회개조의 수단이며 바람직한 인간을 형성하여 개인생활·가정생활·사회생활에서 보다 행복하고 가치있는 나날을 보내게 하며 나아가 사회발전을 꾀하는 작용이라 정의된다. 

배움을 통해 정신의 차원이 점점 높아지는 과정에서 뇌의 주름도 많아지고 지능이 올라간다고 한다. 쉬고 싶고 놀고 싶은 미성숙함을 뛰어 넘고 자신을 이겨야 한다.  고통이 따르고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점은 선수 시절의 혹독한 훈련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고, 나는 역시나 집념으로 하고 있다. 아무도 완벽할 수 없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