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23]

학의 순결함과 고결함은 우리 민족의 상징처럼 여겼던 흰 옷과 아리랑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흔히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했다. 흰 옷을 즐겨 입었다는 뜻을 담는다. 흰색은 무색으로 순결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 속에는 차분함과 의연함을 내포하고 있어 우리 민족의 순결성을 엿보게 된다. 강변에 매화가 핀 뒤로 술이 처음 익어 가고 있는데, 산 위에 달 떠오르자 사람들은 잠들지 못한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鶴(학) / 수암 권상하
강 매화 핀 뒤로 술이 처음 익어 가고
산 위에 달 오르자 잠 못 들어 하는데
그림자 흔들릴 때에 울음소리 들리네.
江梅發後酒初熟    嶺月來時人不眠
강매발후주초숙    령월래시인불면
孤影婆娑竹塢下    淸音寥亮雪窓前
고영파사죽오하    청음요량설창전

눈 내린 창문 앞에 청아한 울음소리 들린다(鶴)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다. 원문을 의역하면 [강변 매화가 핀 뒤로 술이 처음 익어 가고 있는데 / 산 위에 달 떠오르자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고 있네 // 외로운 그림자 대밭 아래에서 흔들릴 때 / 눈 내린 창문 앞 청아한 울음소리 들린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하얀 학을 보면서]로 번역된다. 백색은 순결을 상징한다. 아리랑과 흰옷이라고 했듯이 흰색은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학을 보면 우리 민족성과 무관無關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묵묵한 인고성이다.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어느 지점을 향해 항상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한다. 곧 참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물씬 익어가는 자연의 묘미와 학의 청아한 울음을 듣고 가슴을 저미는 한 줄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강변에 매화가 핀 뒤 술이 처음으로 익어 가는데, 산 위에 달 둥실 떠오르자 사람들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잠들지 못한다, 차가운 겨울보다 매화 핀 따스한 봄 기운이 서리면 술이 익어간다.

화자는 이런 계절이 되면 대밭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학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운 학의 그림자가 대밭 아래 흔들릴 때, 눈 살포시 내린 창문 앞에 청아한 학의 울음소리 들린다고 했다. 대밭이 우는 소리와 학이 우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었을 것이다. 봄과 학의 소묘였으리.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술이 처음 익어가는데 달 오르자 잠 못 들어, 그림자가 흔들릴 때 청아한 저 울음소리’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로 조선 후기 학자이다. 1674년(숙종 1)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이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에 유배되자 산중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했다.

【한자와 어구】
江: 강. 梅發後: 매화가 핀 후로. 酒初熟: 술이 처음으로 익다. 嶺月: 고개 위로 달이 오르다. 來時: 오를 때에. 人不眠: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다. // 孤影: 외로운 그림자. 婆娑: 이리저리 거닐며 늘쩡늘쩡한 모양. 竹塢下: 대밭 아래. 淸音: 청아한 소리. 寥亮(소리가)맑고 멂. 雪窓前: 눈창 앞에.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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