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22]

가을 새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대로 화폭에 엮어 내면 진경眞景이다. 물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안개며, 안개를 뚫고 멀리 보인 전원 풍경은 장관이다. 아침 햇빛을 받아 안개가 자취를 감추는 장면은 용이 승천하기 위해 꼬리를 친다는 것이 연상된다는 어느 시인의 시적인 그림에 탄성을 자아낸 적이 있기에 그래서 추효秋曉다. 비교적 거센 바람에 여울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 쓸쓸한 강에는 낙엽이 흩날린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秋曉(추효) / 규창 이건(선조의 손자)
거센 바람에 여울물 소리 커지고
쓸쓸한 강가에 낙엽은 흩날리는데
주렴을 걷어 올리니 달빛이 밝아오네.
風急灘聲大    江空落葉飛
풍급탄성대    강공락엽비
捲簾仍一望    天畔月斜輝
권렴잉일망    천반월사휘

주렴을 걷어 올리니 가을이 한 눈에 들어오고(秋曉)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규창(葵窓) 이건(李健:1614~1662)이다. 의역하면 [비교적 거센 바람에 여울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 쓸쓸한 강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있네 // 주렴 걷어 올리니 가을이 한 눈에 모두 들어오고 / 하늘가에 비스듬한 달빛이 밝아오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가을 여는 새벽에 / 어느 가을 새벽에]로 번역된다. 가을은 문을 닫고 감상하기엔 아깝다. 가을은 집안에 앉아 눈으로 보거나 상상으로만 감상하기엔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 그래서 가을 나들이를 한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신작로를 걷다가 국향 그윽한 냇가를 찾아 향기에 흠뻑 취한다. 무르익어가는 가을 내음에 마음이 설렌다.

시인은 가을 여는 새벽 공기에 살며시 입맞춤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토실토실 개구리가 이별을 고하는 새벽 그래서 거센 바람에 여울 소리는 제법 커지고 쓸쓸한 강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있다는 선경先景의 시상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여울 소리가 커지고 낙엽 흩날리는 소리까지 감지했다면 무던히도 가을의 한 소묘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화자는 그래도 끝까지 평자의 재촉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집안에서만 가을을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가만히 주렴을 걷어 올리니 싱그러운 가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만 하늘가엔 비스듬히 달빛이 밝아오고 있다고 했다. 가을 소묘를 멋지게 스케치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훤히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여울 소리 점점 커져 낙엽 홀로 흩날리고, 주렴 밖은 가을 소리 비스듬한 가을 달빛’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규창(葵窓) 이건(李健:1614~1662)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시, 서, 화에 뛰어나 ‘왕손삼절’이라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아버지 인성군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를 적극 지지한 바 있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반정공신 이귀가 광해군 복위를 모의하고 있다고 무고하기도 했다.

【한자와 어구】
風急: 바람이 급하다. 바람 소리가 거세다. 灘聲大: 여울 소리가 크다. 江: 강. 空: 공연히. 落葉飛: 낙엽이 흩날리다. // 捲簾: 주렴을 말다. 仍一望: 한 눈에 바라보이다. 天畔: 하늘가에는. 月斜輝: 달이 비스듬히 빛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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