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21]

한국화 한 점은 진경眞景이 많다. 어디나 아름답고 어느 쪽이나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수의 진경을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선비나 직업인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이른바 겸재파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이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우리네 농촌과 산수의 진경은 가히 한국적이겠다. 강물은 숲을 돌고 돌아 맑게도 흐르고 있고, 사면의 산들은 옥을 깎은 듯 아름답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絶景(절경) / 창해 허격
강물은 숲을 돌아 맑게도 흘러가고
사면의 높은 산은 옥층을 깎은 듯도
복숭아 피지 않음을 찾아낼까 두렵네.
長江一臺繞樹澄    四面群山削玉層
장강일대요수징    사면군산삭옥층
臨江不種桃花樹    恐引漁郞人武陵
임강부종도화수    공인어랑인무능

강가에 아직까지 복숭아꽃이 피지 않은 까닭은(絶景)으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창해(滄海) 허격(許格:1607~1691)이다. 원문을 의역하면 [강물은 숲을 돌고 돌아 맑게도 흐르고 있고 / 사면의 산들은 옥을 깎은 듯 아름답네 // 강가에 아직 복숭아꽃이 피지 않은 까닭은 / 행여 어부가 찾아올까 두려워해 그런 것이겠지]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로 번역된다. 시인의 아호가 창해滄海이듯 산이나 바다의 절경을 보고나서 꿈틀거리는 시심을 다 억제하지는 못했을 것임을 알게 한다. 절경이 어디 눈에 보이는 자연에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아리따운 여인의 미소를 보면서도 발동되는 시심은 천지를 뒤흔들었을 것은 분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인은 자연이 온통 봄이 돌아왔다고 어수선함을 떨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강물은 숲을 외돌아서 맑게도 흐르고 있고 사면의 산들은 옥을 깎은 듯 곱고도 아름답기만 하다는 시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온 산이 봄비 한 줌을 맞고 목욕하듯 곱기가 그지없다는 시상을 만지고 있음이 상상된다.

화자의 의문점 하나는 가시지 않는다. 봄이 돌아왔지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복숭아꽃의 태도가 딴으로는 궁금했으렷다. 강가에 복숭아꽃이 아직도 꽃을 피우지 않는 그러한 까닭을 은근슬쩍 자문自問해 보이더니만 자답自答해 보인다. [어부가 찾아올까 두려워해서 그러겠지]라고 했다. 어부는 고기도 잡고 꽃도 꺾을 것이라고 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숲을 돌아 강물 흘러 옥을 깎듯 아름답네. 복숭아꽃 안 핀 까닭 어부 올까 두려워라’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조선 중기의 처사이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허침의 5대손이다. 정묘호란 때 후금과 강화를 맺은 일에 비분강개하며 산 속에서 은거하였으며, 한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한자와 어구】
長江: 긴 강. 一臺: 한 대. 繞樹澄: 나무를 돌고 돌아 맑게 흐르다. 四面: 사면. 群山: 모든 산. 削玉層: 옥돌 층을 깎다. // 臨江: 강에 임하다. 不種: 피지 않다. 桃花樹: 복숭아꽃. 恐: 두려워하다. 引漁郞人: 어부가 찾아오다. 武陵: 무릉도원.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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