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09]

‘도중途中’을 시제로 썼던 시가 많았다. 막혔던 시상도 길을 걷다 보면 불쑥 그려지는 밑그림이 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와 한조각 구름을 보면서 떠올리는 시상을 구름이 눈물을 흘린다고 할 수도 있고, 해가 대변을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구름이 설사를 하는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시인의 마음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밤이 되니 삭풍이 일어나고, 날이 갑자기 추워 길 가기가 어렵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途中(도중) / 신곡 윤계
해 저물어 삭풍일고 길가기 어렵고
흰 연기는 얼어붙어 나무에서 피는데
산 속의 주막 설경이 눈 속에서 보이네.
日暮朔風起    天寒行路難
일모삭풍기    천한행로난
白烟生凍樹    山店雪中看
백연생동수    산점설중간

흰 연기가 얼어붙은 나무에서 피어날 즈음엔(途中)으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신곡(薪谷) 윤계(尹棨:1583∼1636)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밤이 되니 삭풍이 일어나고 / 날이 갑자기 추워 길 가기가 어렵네 // 흰 연기가 얼어붙은 나무에서 피어날 즈음엔 / 산 속의 주막집이 눈 속에서 아련하게 보이니 반갑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길을 가다가 시심이 일어]로 번역된다. 우리 선현들의 시상을 보면 대체적으로 우연한 기회에 시상을 떠올리게 된다. 갑작스런 시심의 발동인 것이다. 그래서 ‘도중途中’이랄지, ‘우음偶吟’이랄지 이렇게 시제를 붙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렇게 시제를 붙이는 경우 시적인 상관물은 눈에 보이는 자연물이 대종을 이룬다.

시인은 어느 날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길을 걸었던 모양이다. 온기가 돌던 낮이 가고 밤이 되니 삭풍이 불어 추위를 느끼는 순간에 시심을 우려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밤이 되니 삭풍이 일어나고, 날이 갑자기 추워 길 걷기가 어렵다고 했다. 지금과 같이 인가가 많은 곳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으슥한 산길 추위에 두려움은 더했겠다.

화자는 이러한 때에 반가운 장면을 만난다. 흰 연기가 얼어붙은 나무에서 피어나 모락모락 올라올 즈음에, 산 속의 주막집이 눈 속에서 아련하게 보이니 반가웠다는 시상을 일구었다. 오언절구의 특성상 시상의 주머니에 후정後情을 듬뿍 담아내기란 많이 어려웠던지 정구情句가 다소 부족한 느낌을 받는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밤이 되니 삭풍일고 날이 추워 힘이 드네. 흰 연기 피어날 즈음 산 속 주막 아련하게’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신곡(薪谷) 윤계(尹棨:1583∼1636)로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의병장이다. 162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전적,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이조좌랑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인조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자 의병을 모집하다 청나라군대에 잡혀서 죽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한자와 어구】
日暮: 해가 저물다. 朔風起: 삭풍이 일어나다. 天寒: 하늘이(날씨가) 차다. 行路難: 길을 가기가 어렵다. // 白烟: 흰 연기. 生: 생기다. 凍樹: 얼어붙은 나무. 잎이 없이 앙상한 나무. 山店: 산 속의 주막집. 雪中看: 눈 가운데서 보다. 눈 속에서 보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