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4]

집안에만 있다가 바람을 쐬고 나면 다소는 기분이 상쾌하다. 멀리 보이는 풍경에 취해서 한 바탕 시상을 일구고 나면 그 물씬한 시심덩이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보는 경치가 그럴진대 길을 걷다가 늘 변하는 경치는 시심 덩이를 더 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망설일 것이 없다. 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시를 쓴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는 세월을 아쉬워하는데 천리 먼 고향 생각이나 아직도 가지를 못한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途中卽事(도중즉사) / 모재 김안국
고향 떠난 나그네 세월이 아쉬운데
머나먼 고향생각 아직 가지 못하고
들판의 복숭아꽃은 저절로 피는구나.
天涯遊子惜年華  千里思家未到家
천애유자석년화    천리사가미도가
一路東風春不管  野桃無主自開花
일로동풍춘불관    야도무주자개화

들판의 복숭아는 주인 없이 저절로 피었구나(途中卽事)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고향을 떠난 나그네는 세월을 아쉬워하는데 / 천리 먼 고향 생각이나 아직도 가지를 못 하는구나 // 왔던 길에 봄바람은 봄을 상관하지 않으니 / 들판의 복숭아는 주인 없이 저절로 피었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길을 가던 도중에 글을 짓다]로 번역된다. 선현의 시상을 읽어내다 보면 길을 걷는 도중에 시를 읊조린 경우는 많다. 시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자 어떤 동기를 보았던지 자연의 모습이나 변해가는 정도를 보면 금방 새로운 시심이 발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고향을 떠나온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시상을 일으켰다.

시인은 고향을 떠나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고향생각이 떠나지 않는 시심을 부여안고 있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 하 많은 세월이 아쉽기만 한데, 천리 먼 고향 생각이지만 아직도 가지 못한다고 했다. 고향은 좋은 곳이다. 깊은 추억과 거기에서 큰 꿈을 키웠기에 깊은 향수가 어리어 있다.

화자는 이와 같은 시상 속에 터벅터벅 걸어왔던 길에 봄을 상관치 않았건만 봄바람 맞아가면서 복숭아는 저절로 피어있다는 후정後情을 일구어냈다. 왔던 길에 봄바람은 봄을 상관하지 않으니, 들판의 복숭아는 주인 없이 저절로 피어있다고 했다. 관계가 없는 것(봄바람)을 관계있는 것(복숭아)처럼 꾸며내는 시상의 멋은 시인만의 권한이자 시인만이 부릴 수 있는 멋이자 맛이겠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고향 떠난 나그네가 고향 생각 못하는데 봄바람은 상관하지 않네 복숭아꽃 피어있고’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1권 2부 外 참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잠서언해>, <이륜행실도언해>, <여씨향약언해>, <정속언해>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창진방> 등을 간행 보급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자와 어구】
天涯: 하늘가. 遊子: 나그네. 惜年華: 세월을 아쉬워하다. 千里: 천리. 먼 거리. 思家: 고향을 생각하다. 未到家: 아직도 가지 못하다. // 一路: 한 길. 東風: 동풍. 春不管: 봄은 상관하지 않다. 野桃: 들판의 복숭아. 無主: 주인이 없다. 自開花: 저절로(홀로) 피어있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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