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한 집안에는 족보라고 해서 그 가문의 내력 등이 적힌 대동보가 있고 또한 직계만 기록한 가승보가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군에는 군지가 있다. 이 군지에는 군의 역사 문화 체육 경제 등 모든 분야가 수록돼 있다. 물론 홈페이지나 카페 등을 찾아보면 되겠지만 이 또한 작성할 때 군지나 기타 자료에 의해서 입력되기 때문에 군지는 매우 중요하다. 

홍천군지는 1986년경에 준비돼서 그 이듬해 출간됐다. 최초의 군지편찬위원으로 황승모(작고) 씨가 위원장이 돼서 홍천농고 동창회 사무실에서 최초의 기초자료를 수집했다. 최초의 군지 편집자료 중 하나가 1965년 홍천군청에서 발행한 동계연보고 또 하나는 홍천교육청(현 교육지원청)에서 발행한 “향토지”로 발행자는 당시 교육장이던 이우열(작고) 씨로 201쪽에 흑백사진을 곁들인 양장본 검은 표지다. 1967년 7월30일자로 발행됐다. 홍천군지의 기초자료 초본은 여기에 기재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됐다. 필자는 자료편집 기초위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인제군(농협)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편집위원에서 빠진 후 발간됐다.

군지는 30년을 기준으로 재작성 된다. 새로 발간되는 군지는 2018년을 기준으로 주체는 홍천군이고 주관은 서울역사문화연구소이며 집필진은 문화연구소에서 지정한 강원대 교수 외 기타 집필진이다. 역사인물은 전 강원대와 관동대 교수(문학박사 역사 전공)이며 독립기념관 학예사(부이사관 대우)로 퇴직한 역사전문가가 집필하였다. 필자는 편찬감수자의 한사람으로 초간 공람지 4권(상·중·하권과 별권)으로 약 2천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감수했다. 최초의 군지는 단권으로 약 500여 쪽이었던 것에 비하면 네 배나 되는 분량이다.

책은 영상문화나 언어 표현과 달리 한번 인쇄돼 배포하면 다시는 고칠 수가 없다. 그 책이 소멸되기 전까지는 영원히 남는다. 반포할 때 제대로 만들어야지 오류가 있다면 집필진과 감수자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장(군수)도 원성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때문에 집필도 그렇고 감수 군수도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몇 억 원을 들여서 수천 부를 발행하는데 내용을 보고 또 보고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주관단체와 행정당국(군청) 집필자와 감수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공청회나 회의 자리를 만들어 토론을 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감수자) 편집위원이나 집필자들과의 합평회(공청회)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다만 담당자와 서울역사문화연구소장과 몇 차례 전화 통화한 것이 전부다. 감수의견서를 작성 위원장(2018년도 말 문화원장)에게 제출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토론한 적도 없다. 원래는 감수자 의견을 집필진과 대화를 해서 누락 추가 변경 추가 등을 협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집필진들이 향토인이 아니기에(인물편집 제외) 오류와 누락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열람본에 의하면 홍천지역에 군부대 영향이 큰데 11사단이 1950년부터 주둔했다라고 기재했다. 홍천에 필자가 알고 있는 군부대 주둔만 해도 6.25 한국전쟁 당시 8사단 이기자부대 맹호사단 6사단 등이 주둔했던 곳이다. 홍천군의 사회단체명도 누락되고 국제클럽 종교단체 지역인물 등등 누락된 것은 감수의견으로 제시했다.

새마을 운동은 그 뿌리가 국민재건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역시 서술이 잘못됐다. 최종 인쇄가 되기 전에 집필진과 감수자 관계인이 합평회를 열어서 토론을 했으면 한다. 이대로 인쇄 작성돼서 배포된다면 향후 30년뿐만 아니라(군지는 30년마다 증보 개편함) 수백 년 수천 년 잘못된 것이 전해질 것이다.

어떤 일이든 경중완급이 있다. 군정도 그렇다. 그 중요도에 따라서 일처리를 했으면 하는 것이 군민의 한사람으로서 진언을 하고 싶다. 감수자로서 두 번째로 나오는 홍천군지야 말로 홍천군을 알리는 족보요 얼굴임을 인식하고 좋은 군지가 발행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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