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사람들에겐 지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겪는 그 많은 사건들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현재 난 어떻게 됐을까?

필자의 경우도 그 만약이란 게 참으로 많았다. 우선 직장(농협은행)에 안 가고 다른 직업을 택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70년대 춘천으로 발령을 받고 근무할 때 이사를 갔다면 어찌됐을까. 직장을 안 갖고 사업을 했으면 또 어찌 됐을까. 독자들께서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문학공부를 했다. 중학교 때 문예부에 들어가 홍천중학교(교장 사종선) 최초의 도서관 개설에 참여했다. 당시 문예반 회원으로는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임(2018년 8월)된 홍운 전상국 작가가 있었고 지도교사로 국어교사인 홍종구 선생님이 계셨다.

1954~6년 사이 글짓기 공부를 하면서 표어 짓기에 관심을 두어 현재 국민 표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불조심 표어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보자”를 지었다. 방첩 표어로 “비밀이 새는 구멍 크기 전에 막아내자”와 독서주간 표어 “책 읽고 배우고 배워서 잘살자” 등을 발표 당선됐다.

그 후 성인이 돼서도 표어에 관심을 두어 환경표어로 “오염은 한순간 정화는 한평생” 등이 전국대회에 당선됐고 이 표어를 응용해서 “사고는 한순간 후회는 한평생” “산불은 한순간 복구는 한평생” 등이 연이어 나왔다.

홍천의 대표적 문화제였던 한서제와 한서문화제 무궁화축제 때 이 행사의 캐치프레이즈(표어)인 “무궁화 큰잔치 화합의 한마당”도 필자가 지은 것이다. 이젠 홍천군 문화제 행사 때 쓰지 않고 사라졌으며 후반 구절인 “화합의 한마당”만은 이런저런 행사에서 쓰고 있다.

어떻게 보면 표어는 한 문장의 최소로 함축된 글이라고 하겠다. 만약에 그 때(중학교 때) 표어를 안 썼다면 이러한 표어들이 현재 존재할까 자부해본다.

필자의 경우 직장에 있으면서도 문학과 홍천의 문학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홍천 최초로 문학동인회를 구성(1960년)해 동인지 “문향” “층계” “이십대” 등을 발간했고 이것이 근간의 모체가 되어 현재의 홍천문학이 탄생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문화원 활동으로 1976년 홍천문화원 창립회원이며 당시 박진명 초대원장이 10년 2대 김관원 원장이 14년을 했다. 당시 부원장이던 김상옥과 필자는 직장(농협군지부)에 있으면서 적극 참여했다. 김관원 원장이 이런저런 사유로 임기 2년을 남기고 사임하고 당시 수석부원장인 김상옥 씨가 잔임 기간을 마치고 황우근 씨를 상대로 경선을 치른 끝에 당선이 돼서 4년을 더해 6년으로 끝냈다.

이어 7대째 필자가 원장에 뜻을 두었으나 지인(동창)인 허기영(당시 교직을 끝내고 서예회원으로 있었음) 씨가 원장을 하겠다고 해서 필자는 차기에 나가기로 약조하고 양보해 고광환 후보와의 맞대결 끝에 신승을 했다. 그 후 4년이 끝나고 허 원장이 또 하겠다고 해서 만부득이 필자와 경쟁 투표 끝에 필자는 쓴 잔을 받고 지인은 2선에 성공했다.

그 후 필자는 홍천예총 회장과 문학 활동을 계속했고 허 원장의 임기가 끝난 후 9대 선거에 당시 사무국장인 김병국 후배와 경선 끝에 또 낙선을 했다. 그 후 김 당선자가 일신상의 사유로 원장을 1년 하고 김종은 현 원장이 타 후보자들의 등록취하로 1인 등록 절차로 투표 없이 10대 원장에 취임했다.

11대 홍천문화원장 선거가 이제 1개월여 남았다. 예상 후보로는 필자를 위시해서 몇 명이 있는데 아쉽게도 학교동문 후배도 있다. 하여 마음이 복잡하다. 우리지역의 향교나 노인회나 문화원 같은 곳에서는 화합을 위해 선거를 안 했으면 좋겠다. 순리대로 좋은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위해 문화원 회원과 지역 어르신들과 동문 지인 등이 뜻을 모으고 여기에 솔로몬의 지혜를 보태 경쟁적 선거만은 피했으면 오죽 좋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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