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며칠 전 홍천경찰의 수장인 홍천경찰서장이 새로이 부임했다. 오십대 초반의 우리 고장(홍천중·고, 경찰대) 출신이 금의환향한 것이다. 일선 경찰서장을 경찰의 꽃이라고 한다. 군민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동안 서울 본청에서 두루 경력을 쌓고 강원도에서는 정선경찰서장을 거쳐 홍천으로 부임한 것이다.

일선 경찰의 업무는 고달픈 것이 무한의 책임과 의무가 많은 직업이다. 과거 정부 때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일을 했다. 최 일선인 파출소(지구대)의 일상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1960년대 홍천읍 신장대리 신장대파출소 인근 30m쯤에 필자가 10여 년 이상을 살았다. 파출소장인 지인이 있어 자주 들렀고 차석이나 직원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당시는 경사가 소장이었고 차츰 계급이 올라서 지금은 경위와 경감이 지구대 최고 책임자다. 1975년 필자가 희망리로 이사를 했는데 신장대파출소가 너무 비좁아 현재 희망지구대로 이전을 했다. 필자의 집에서 직선거리로 100여m쯤 된다. 건물을 아담하게 짓고 불철주야 주민의 치안을 위해 노력을 한다. 경찰은 주민생활의 안전을 위해 최측근에서 일을 한다. 지금의 소방서에 119가 생기기 전에는 그 일까지(지금도 일부 겸업을 하고 있다) 했던 기억인 난다.

수년전 추운 겨울 필자가 동면에 볼 일이 있어 가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오룡터널이 없던 터라 여우고개 이괄바위 밑은 응달로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길바닥이 얼어 매우 미끄러웠다. 그런데 경찰 한명이 차를 세워놓고 모래를 뿌리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필자가 일을 다 보고 다시 이곳을 지날 때 그 경찰(순경)은 상의를 벗고 본격적으로 모래를 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필자가 “수고한다”고 인사하자 그 경찰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했다. 그 후 필자는 이 내용을 모 신문 독자란에 기고를 했다. 수일 후 도경에서 이 기고를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온바 있다. 그 경찰관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서 지금은(이름도 성도 모름) 도 경찰청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필자의 손자가 5살때 이른 저녁을 먹고 지구대 앞을 산책할 때 손자가 “할아버지 저 경찰차 타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마침 경찰차가 시동을 걸어놓고 순경이 내리려 하기에 필자가 용기를 내어 “순경양반 얘가 경찰차 한번 타보고 싶다는데 가능할까?”라고 하자 순경은 바로 “그러지요 뭐”하며 손자를 덜렁 들어 운전대 옆에 태우고 지구대 인근을 한바퀴 돌았다. 물론 법규(근무수칙)로는 안 되는 일이겠지만 아이에게는 최고의 경험이었다. 필자의 곁을 떠나지 않던 손자가 경찰차를 혼자 타고 낯선 순경아저씨와 잠시나마 동행을 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역시 수년전 일이다. 필자의 지인이 옛 경찰서(지금의 읍사무소) 인근에서 부산물가게를 할 때다. 필자는 자주 이곳에 들렀다. 한번은 오토바이(50cc)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했으며 브레이크를 고치고 나서 작동이 잘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내가 타볼게” 하면서 점포 앞에서 구 경찰서 쪽으로 20m쯤 갔다. 그때 뒤에서 경찰차가 나타나서 정지를 시켰다. 이유는 헬멧을 안 썼다는 것이다. 필자는 전후사정을 얘기했다. 순경은 면허증을 요구했다. 면허증을 집에 뒀다고 하니까 가져오라 했다. 서로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필자는 오토바이를 점포 주인에게 주고 경찰차를 타고 운전면허증을 가지러 경찰과 동행을 했다. 가는 도중 치킨배달 알바생이 역시 헬멧 없이 오토바이를 모는 것을 보고 순경은 급정거를 하고 섰다. 그 학생도 벌금 3만 원이었다. 물론 필자도 3만 원의 벌금을 물었다. 당시 그 학생이 3만 원이면 하루 종일 알바해서 번 돈을 범칙금으로 납부했으리라. 그렇다고 그 순경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 집행에 있어 뭔가 좀 쓸쓸한 마음의 여운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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