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소담스럽게 피어 정원의 안방 마님 같던 목련이 오늘은 지고 있다. 그가 자신의 몸아래 떨어뜨려놓은 뒤끝이 어지럽다. 흑갈색으로 변질된 새의 시체 같은 꽃잎들이 초록의 잔디위에 어쩐지 슬픈듯하게 누워 있다. 산 아래 까지 서둘러 내려 온 안개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들 등위에 올라 앉아 보랏빛으로 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런 날이면 영국출신 여가수 마리안느페이스풀의 ‘This little bird'라는 너무 아파서 가슴이 아린 오래된 팝 하나가 나의 아침을 지배한다. 잘못된 연애와 과도한 언론의 관심으로 마약과 술에 절어 아름다운 날들을 다치게 되었던 팝 가수. 아프고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이겨내고 다시 대중 앞에 굳건히 서서 아직도 노래하는 영원한 레전드, 그녀가 추억되는 아침이다. 얼마 후 쨍하고 해가 뜨면 보랏빛 안개는 자취를 감출 것 이며, 모든 물상들은 세계 앞에 또렷이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는 바쁘고 험난한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이런 뿌연 안개 속에서나 가능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의 조각을 꿰맞춰 조곤조곤히 사랑하는 나의 연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나의 연인은 이제 대학 2학년이다. 이글을 찍는 이 순간 연인은 나의 침실에서 아무렇게나 이불을 덮고 아직 잠자리를 털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11시 수업이고 그 수업이 오늘 수업의 전부이다. 가끔 부스스 눈을 비비고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기는 한다. 나는 그를 위해 순두부찌개를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그가 깨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가정교육의 철학이고 나의 방침이다. 대학생이 되었건 아직 미성년이건 간에 잠에서부터 공부 옷 입는 거 일체의 행위를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실수를 책망하거나 잘못을 교정하려고 내가 또는 사회가 옳다고 전통적으로 내려 온 방식이나 지침들을 곱지 않은 목소리로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을 극구 지양한다.

지난 주 금요일 한창 수업 중인데 손 전화 알림 메시지가 급하게 다서, 여섯 번 울렸다. 덜떨어진 나의 연인의 메시지이다. 병원 진료비 내라고 들려 준 신용카드를 잃어버렸단다. 상황이 안좋은 게, 어깨가 아파 정형외과에 가서야 카드 분실을 알아차렸단다. 늘 그래왔듯이 무통장입금을 시킬 수 있는지 물었었다 한다. 그 병원은 절대 불가라 말했고 난감해진 그가 엄마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아들, 아무 걱정 말고 치료 받아.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그런데 그 병원 이름이 뭐야?”

“몰라. 나 지금 지하 물리 치료실이라 여기 이름 몰라.”

“그럼, 옆 침대 누워계신 환자분께 여쭤봐라.”

그 병원은 작년 11월에 두 번이나 그가 다녀왔던 병원이었다. 그런데 병원 이름을 모른다.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뭐. 간호사님께 전화를 걸어 치료비 8200원을 토요일 오전 출근길에 갔다 주기로 해결하고 아들의 카톡 메시지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알려 놓았다. 신용카드는 보라매 대학병원 무인지급기에 꽂아 둔 것 같다는데 병원 분실물 센타에 확인하니 없다. 물리치료를 다 끝낸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미안해요. 바쁜데 제가 엄마 또 더 바쁘게 만들죠?! 헤헤 그런데 엄마 이거 제 잘못 아니죠?! 엄마가 손가방 안 사 주셔서 그런거죠?! 그쵸?!”

그래, 이놈아 다 내 잘못이다, 그래. 손가방 안 사줘서 들고 다니다 놓게 만든 다 이 에미 탓이다. 짜증이나 면박으로 그렇잖아도 스스로 불편할 그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 모자는 이런 식으로 홀가분하게 그날의 해프닝을 마무리 한다.

아들이 고3때 기숙사 생활을 할 때였다. 1학기를 마치면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수능 준비 정도는 가볍게 마무리 해 오던 아들이 9월을 맞이하면서 생긴 일이다.

이렇게 헐렁해 뵈는 아들이지만, 자기관리가 아주 안되는 편은 아니다. 내 생각엔 일상의 규칙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아야, 인격체들의 학습이나 독서 관리가 자기주도하에 가능해 진다고 본다. 아들은 내신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수능 공부도 비교적 수월했다. 그런 그가 9월 어느 날 뿅 하고 사라졌다. 어디로? 피시방으로. 기숙사 사감의 전화를 받고 아들이 오후부터 일찍 피시방으로 납시었음을 짐작하였다. 나는 기숙사 사감에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들은 오후부터 배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와서 죽을 먹고 집에서 지금 나랑 쉬고 있는 걸로,...그 길로 인터넷 검색으로 아들의 피시방 반경을 검색했고 전화로 아들의 아이디가 들어 있는 피시방을 알아냈다. 아들이 있는 피시방 건물 밖에서 3~4시간을 기다렸다. 아, 그보다 먼저 피시방 카운터에 가서 이렇게 당부했다.

“저 아이가 오면 항상 잘 해주세요. 음료수도 여러 번 갖다 주고 항상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저렇게 헐렁해 뵈도 우리나라의 거름이 될 아이거든요.”

“그럼요. 우리 피시방 V.I.P인데요.”

피시방 V.I.P 아드님, 10시를 넘겨 청소년 쫒겨 나는 시간이 되자 정신이 퍼뜩 들어 전화를 해 왔다.

“엄마, 나 기숙사 무단이탈 했어. 어떡해? 기숙사 퇴소 명령 받게 생겼다. 엄마 나 피시방에서 8시간 놀아서 돈도 모자라.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엄마가 피시방 사용료 다 계산 해 놓았고 기숙사엔 네가 무지하게 배가 아픈 걸로 한 방에 다 해결해 놨지,...나오기나 해 임마. 가서 늦은 밤에 곱창에 맥주나 한잔 마시자!

우리 모자의 일상은 앞서 예를 든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반복이다. 엄마는 그래서 존재하는 거고 아들은 또 세상(누리) 가운데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편을 들어주는 강력한 자기 편 하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감히 단언하는 아침이다. 아직 안개 중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쉬 개일 것 같지 않은 날이다. 그래도 안개 속에 꽃향기가 진동하는 아침이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