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길을 나서는데 이봉조 작사 현미의 노래 ‘밤안개’가 입에서 맴돈다.
기분 좋을 때 가끔 있는 일이다.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임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가득히 나는 간다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임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가득히 나는 간다

이봉조는 1957년 김명선이라는 본명을 가진 가수 현미를 미군 쇼 무대에서 처음 보게 되고 현미를 가수의 길로 인도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부부의 인연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후 이봉조는 악단을 만들어 단장을 하면서 작곡가로 데뷔를 하는데 이들 둘이서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밤안개’라는 노래다. 1962년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이봉조 작사 작곡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봉조 작곡이 아니고 미국의 에디 히긴스 쿼텟이 연주한 “It’s a Lonesome Old Town”이라는 음악이다.
그래도 이 노래의 음률이 좋다. 안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특히 시인이나 화가 사진작가 작곡가들에게는 또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화촌면 군업 ‘말고개’ 넘어 ‘조하대(조가터)’다.
‘조하대’는 예전부터 네거리를 이루던 곳이다. ‘술음골’을 넘어 ‘주음치’로 가고, ‘당무’로 가고, ‘장평’으로, ‘홍천’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따라서 예전부터 주막을 이루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였다.
지금 ‘조하대’의 가게 앞에서 개울로 이어지는 길 양편으로 늘어섰던 주막과 국밥집, 색시집에선 노래 소리로 흥청거렸고, 또한 가게는 일본강점기시대의 배급소로서 큰 창고가 있었다.
언제부터 ‘조가터’라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최근 마을에서는 ‘조하대(朝霞垈)’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조하대’로 부르고 있다.
‘조하(朝霞)’는 아침노을이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세상이 열리는 순간 온 하늘은 붉게 물들며 시작된다.
산이 높고 우물처럼 형성된 ‘조하대’는 아침노을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아침노을’은 푸른 하늘을 태워버릴 듯 타오른다. 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올라 아득히 깊다.
‘조하대’에서 ‘말고개’를 넘는 ‘서낭당골’에는 커다란 소나무와 당집이 있었고 고개를 오며가며 쌓은 돌무덤이 있었다. ‘술음골’로 이어지는 ‘술음재’는 ‘주음치’로 이어지고 ‘명동골’은 양지바른 둔덕을 이룬다.
가게집 평상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해장술을 하고 있다.
‘햇뜰고개’까지 천천히 걸어 올랐다. 안개가 걷혔지만 박무가 남아있다. 해는 ‘햇뜰고개’ 위를 훌쩍 뛰어올라 ‘오봉산’ 위쪽에 자리 잡았다. ‘조하대’와 어울리는 고개다.
활처럼 굽어지는 ‘햇뜰깨비’에서 샛길 하나가 ‘알프스밸리’로 이어진다. 큰 연자방아가 서있는 어귀에는 금계국이 활짝 피어있고 길 양편으로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늘어선다.
‘햇뜰고개’는 장평과 경계이면서 아침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곳이다. ‘조하대’는 이곳의 광경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다.
해가 제일 먼저 뜬다 하여 ‘햇뜰깨비(구비)’라 부르는데 산능선을 넘던 고개를 뚝 잘라 56번국도가 휘돌아간다. 고개를 낮추느라 깎아낸 절개지가 벽처럼 서있다.
산 뿌리가 닿았던 구비에는 수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 구비를 돌아다녔다 한다.
‘햇뜰깨비’ 아래에는 바위사이로 흐르는 물이 머물다가는 ‘은구뎅이소’가 있다. 군평초등학교 졸업생들의 기억 속에는 멱 감던 장소로 남아있는 곳이다.
‘매봉산’에서 이어져 내리는 능선이 오형제 봉우리를 이루고 개울물은 ‘오봉산’ 밑을 돌아 흐른다.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아 한여름에도 얼음골처럼 서늘하다. 개울 중간중간 돌담을 쌓아 징검다리 겸 물놀이에 안성맞춤이다.
이곳이 은항아리가 나왔다는 ‘은구뎅이’이다.
‘은구뎅이’에 자리 잡은 ‘알프스밸리(구 오봉산타령관광농원 : 대표 안치형)’는 넓은 주차장과 시원한 개울물, 오형제봉이 평풍처럼 둘러선 관광농원이다. 한옥으로 둘러선 펜션과 참나무 장작불에 직접 굽는 흑돼지 바베큐의 맛이 일품이고 캠프파이어를 하며 먹는 삶은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는 훈훈한 산골 인심과 정을 더해 오랜 추억거리가 된다.
개울에서는 견지낚시로 피라미를 잡고 다슬기를 잡는다.
느티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철마다 피어나는 꽃들의 향기가 곳곳에 놓인 연자방아와 그네에 실려 은은하게 와 닿는다.
알프스밸리를 돌아나오는 길에는 지금은 금계국이 한창이지만 연자방아처럼 돌고 돌아 제철을 만나면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꽃을 피울 것이다.
큰길로 나서 비둘기가 집을 짓고 새끼를 쳐 나간다는 ‘비둑바위’를 돌아 다시 ‘조하대’로 나왔다. ‘비둑바위’는 국도 확장공사로 부서져 이름만 남았다.
최근에 ‘조하대’에서 ‘공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확포장되어 읍내까지 2~30분이면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속을 찾아 자연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밭을 일구고 나물을 캐며 살아가는 곳이 남아있다. ‘군둘’이다.
주막을 이루었던 ‘건넌말’에서 다리를 건너간다. 주막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우울한 창가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흐르는 물소리는 마음을 씻어내는 듯 청아하다.
다리를 건너면 ‘조하대 응달말’이다. 군업국민학교(군평초등학교의 전신)터다. ‘조하대’, ‘장평’, ‘군둘’, ‘당무’, ‘도광터’, ‘답염밭’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아이들이 많아 학교를 증축해야 했지만 여의치 않아 ‘장평’으로 옮겨 군평초등학교로 개명을 하게 된다.
‘응달말’과 ‘안말’ 사이의 ‘웃동산’, ‘아랫동산’을 지나면 한국도로공사 현장사무소가 자리하고, 다리를 건너면 ‘군둘’ 어귀다.
‘군둘’은 난리 때 의병들이 숨어 있었다 하여 ‘군대곡(軍垈谷)’, ‘군두(軍杜)’, ‘군둘’로 부른다. 골짜기를 이루는 곳곳에 바위벼랑과 버덩을 이루고 있고, ‘당무’와 ‘장평’, ‘서석’으로 이어지는 고갯마루는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천혜의 요지였다.
특히 ‘출병골’은 동학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출병을 했다며 지기복(74) 노인회장은 ‘군둘’에 살았던 기억을 풀어놓는다.
“‘군둘’ 어귀에서 ‘당무’로 넘던 ‘밤나골’을 지나면 바로 ‘출병골’이지요. ‘출병골’을 지나 건너편에는 ‘절토골’인데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는 등강에 절터가 있었지요. 언제적 이야기인지 확실치 않지만 말이지요.
절터 아래는 ‘광골’인데 안막을 들여다보면 하늘을 찌를듯한 바위벼랑이 ‘줄뱅이’로 이어집니다. ‘줄뱅이’는 바위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평풍(병풍)바위’라 합니다. ‘느티나무골’도 있지요.
특히 ‘자작나무골’은 마을사람들이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상골’ 때문이었지요. ‘상골’이 많이 나서 ‘상골구뎅이’라 합니다.”
‘상골’은 깊은 산속 맑은 계곡의 용출수에서 서식하는 민물조개다. 크기는 겨우 2미리에 녹두알만해 모래 속에서 구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한다. 작은 조개는 몸도 납죽하다. 얼핏보면 돌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조개를 줍는다고 하지 않고 캔다라고 한다.
이 조개는 허준의 동의보감에 방합(蚌蛤)이라고 나타난다. 민간요법으로 부러진 뼈를 붙게 하고 어혈을 없애며 통증을 멈추는데 효험이 있어 인근 동네에서 상골을 캐러왔다고 한다.
“‘작은자작나무골’을 지나면 ‘횟가마골’이지요. 횟돌을 캐다가 돌구덕을 만들어 2~3일 숯 굽듯 굽고 물을 뿌려 회를 만들었습니다. ‘망밭골’을 지나 ‘상동골’로 들어서면 ‘장평’으로 넘던 고개가 나옵니다.
‘자작나무골’ 어귀부터 ‘상동골’ 어귀까지를 ‘석동골’이라 하는데 벌통을 석동(세통) 씩이나 쌓아 올렸다 할 만큼 벌이 실하고 꿀을 많이 떴습니다.
‘아갈바위’는 입을 벌린 듯 서있던 바위였고 ‘진천굴’, ‘큰밭골’을 지나 ‘무당바위’가 있던 ‘건넌골’을 지나면 불당이 있었던 ‘불당골’이지요.
‘장평 장팥’으로 넘던 골은 ‘옥나무골’입니다. 옥나무는 뽕나무를 그리 부르는데 뽕을 따러 이 골짜기를 많이 다녔습니다. 이 골짜기의 뽕을 먹어야 누에가 옥처럼 윤기가 나고 좋은 고치를 짓는다고 하죠.
‘군둘’에서 ‘당무’로 넘던 고개는 ‘군둘마나리’이고 ‘멸개울(명계동 明鷄洞)’에서 ‘돈넘이재’를 넘으면 ‘도광터’가 나옵니다. ‘돈넘이재’는 가파른 낭떠러지기 비탈이래서 굽이굽이 돌고 돌아 가야한다고 하여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안막은 ‘황정골’입니다.”
‘황정골’은 ‘군둘’의 뱀막이다. 뱀막으로 이어지는 ‘광산골’, ‘가는골’, ‘독밭골’은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들이고, ‘군둘’ 개울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지금은 임도가 ‘매봉산’을 중심으로 ‘솔치’와 ‘동면’, ‘물골’, ‘도광터’로 이어진다.
골짜기 안까지 토사방지 사방댐을 막아 정비를 했지만 문제는 훼손되어 가는 골짜기다.
‘군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아 들어와 토굴을 짓거나 집을 짓고 산골오지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 기회에 산림청 및 국유림관리소에서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천혜의 자연을 둘러보는 오지체험 테마 관광 상품을 개발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키지 못할 바에야 호기심과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체험장을 마련하여 도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주는 것이다.
‘황정골’로 넘지 않고 ‘돈넘이재’를 넘어 ‘멸개울’로 들어섰다. 그러나 임도를 따라 이어지는 골짜기는 ‘지치박골’을 돌아 ‘멸계울’을 지나 ‘큰아홉마지기’의 ‘백가터’를 돌아 ‘병목골’에서 ‘작은아홉마지기’ 어귀에 닿았다.
‘도광동’ 안막 ‘삼세미’였다. ‘삼세미’는 매봉산에서 공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아래 ‘큰아홉마지기’와 ‘작은아홉마지기’가 합치는 합수머리다.
‘도광동’은 매봉산 품안에 든 그윽한 마을이다. 너른 뜰이 있고 물이 실하다. 예전에는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더덕향기가 상큼한 마을이다.
‘큰아홉마지기’에는 ‘백가터(박가터)’가 있다. 마을까지 내려오려면 이십리 길이다. 이집에 살던 노인은 한 달에 한 번쯤 장을 보러 나왔다는데 지게 한 가득 약초를 지고 나왔다고 한다. ‘둥지봉골’에는 ‘부엉이둥지’가 있었다고 하며 ‘마당둥지’를 지나 내려오면 골짜기가 병목처럼 가늘어지는 ‘병목골’이다. ‘작은아홉마지기’를 오르다가 ‘심박골’과 갈라지고 뱀막에서 공작산 줄기로 이어지는 능선에 닿는다.
좁씨 아홉 말을 뿌릴 만큼 너른 땅이 있었을까? 혹시 논이 아닐까? 화전민들이 살았던 시대라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삼세미’에는 기왓장이 많이 나오는데 아마 절이 있었던 것 같다. 숫돌이 귀했던 시절 불에 구운 기왓장을 주어다 칼이나 낫을 갈았다고 한다.
‘큰물골네미’는 ‘서석 이금이’로 이어지고 ‘작은물골네미’는 ‘새고개’를 넘어 ‘동면 물골’로 이어진다.
‘멸계울’은 골짜기가 깊다. 원래는 ‘명계동(明鷄洞)’이다. 임도가 나기 전에는 ‘돈너미재’를 넘어 ‘군둘 멸계울’로 넘어다녔다. 둔덕을 이루는 밭 한가운데 삼백년이 넘는 밤나무가 서있는데 밭에 그늘이 들어 베려고 날을 잡았는데 꿈에 조상이 나타나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여 더욱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가을이면 알밤이 세가마나 나온다고 한다.
둔덕은 모두 더덕 밭이다. ‘금정골’ 어귀의 ‘공작산 더덕농장’에서 심었다.
산 밑에 선 작은 농가에는 아직도 디딜방아가 남아있다.
‘연재기골’은 ‘밤나무골’과 마주하는데 제비가 제일 먼저 날아와 집을 짓는다고 하며, ‘밤나무골’ 어귀에는 큰 구나무(굴피나무)와 바위 앞에 서낭당이 있었다.
‘금정굴’과 ‘터골’, ‘대월’은 공작산 능선으로 이어지고 ‘때골’을 지나면 ‘공작고개’로 이어지는 ‘삼막골’ 어귀다.
‘삼막골’을 따라 오르면 공작산 들머리인 고갯마루다. 주차장과 화장실, 작은 정자가 있고, 일흔이 가까운 등산 안내원이 공작산 산행안내를 하고 있다.
고개를 내려가면 공작산 저수지가 나온다.
다시 ‘삼막골’로 내려 오다보면 삼막골 사슴과 흑염소 농장에선 흑염소들이 뿔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한다.
‘큰아홉마지기 백가터’ 샘물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대월’과 ‘공작산 삼막골’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쳐 ‘피나무구비’를 이루며 맴돈다. 한 쌍의 학이 서있는 ‘공작산계곡야영장’은 숲과 물이 조화를 이룬 휴식처다. 작은 폭포를 이룬 옥수가 잠잠한 하늘을 받쳐 들고 다리 아래로 흐른다.
‘당무(唐武)’- 당나라 군사들이 지나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삼국시대 일이다.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야망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고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 총관은 소정방이었다.
소정방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움직이지 않으니 전쟁도 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써도 말이 움직이지 않자 당산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말들이 이 마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말 때문에 전쟁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당산에 올라 당제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 역사가 1,300년도 훨씬 넘는다.
고려 때부터는 3년에 한 번씩 당제를 지냈다고 하고, 일제강점기 시절엔 당제를 올리지 못했다 한다. 그 후 해방이 되고 30년이 지나도록 당제를 지내지 않다가 호국지산과 마을의 안녕,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자는데 뜻을 모아 음력 삼월삼일, 칠월칠석, 구월구일 세 차례 공작산과 당산에서 남신과 여신을 함께 모시는 제를 올린다.
‘당무’의 중심은 마을 앞 ‘당산(堂山)’이 된다. 당무분교가 있었다. 솔무정을 이루며 울울창창 들어섰던 소나무는 지금 한 그루만 남아 홀로 외롭다. 나머지는 다 베어 홍천향교 홍문을 세우는 재목으로 썼다. 최근에는 어느 독지가가 산골 도서관을 꾸리고 있다.
‘수골’ 어귀의 소나무도 한 자태를 한다. ‘학교터’에서 둔덕을 올라 ‘굴아우(구라우)’로 이어지고 ‘덕재’를 넘어 군업2리 ‘안말’로 넘어 다니기도 했다.
‘건넌뜰’, ‘마나리’는 깊다. ‘마나리’는 원래는 ‘만을리(萬乙里)’이다. 골안으로 들어가다가 ‘미골’과 갈라지고 안막에서는 ‘군둘’ 어귀 ‘밤나무골’로 이어진다.
‘당무’와 ‘도광터’는 ‘조하대(조가터)’와 공작동을 잇는 도로가 개통 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공작산의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는 기상이 서린 마을이다.
‘곤지목골’을 지나 ‘아우라지’로 든다.
‘햇뜰깨비’를 돌아 내려오는 ‘장야촌(장평)’의 개울물이 ‘오봉산’을 감고 돌아 흐르고 ‘군둘’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조하대’교 위쪽에서 만나 ‘구유소’를 이루고 ‘벼락바위’ 밑을 맴돌다가 다시 ‘아우라지’에서 ‘도광터’, ‘당무’를 흘러온 개울과 합쳐 ‘답연밭’으로 흐른다.
홍천 오지 중의 오지 ‘선바위’가 있고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답연밭’은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서울대 면역의학연구소 건립 예정지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이곳에 훌륭한 교수님들의 휴식처만이 되지 않기를 앙망할 뿐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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