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재(一鑑齋)’를 다시 돌아본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그 흔적이라도 남겨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언젠가 이곳 일감재에서 강론을 들었던 화서(華西)의 제자들의 후손들을 초대하여 함께 둘러보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화촌중학교 앞에서 서석, 내면 가는 버스를 타고 군업천의 발원지인 ‘장평’으로 향했다.
‘내삼포’, ‘군업’, ‘조가터’를 지나 ‘장평’, ‘솔치 터널’ 어귀에서 내렸다.
화양강의 한 축을 이루는 ‘군업천’의 발원지를 찾아보고 ‘조가터’, ‘당무’, ‘군업’을 물을 따라 답사하려는 생각이다.
‘장평’은 동학농민운동사에 ‘장야평’으로 등장한다.
중부 내륙 홍천 일대에서 차기석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10월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10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가했다. 홍천과 가까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10월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서석으로 후퇴하여 풍암리 진등 구릉 위에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횡성현감 유동근이 이끌고 온 관군과 맹영재가 이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인 자작고개전투이다.
동학전쟁터가 장야평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관군에 쫓긴 농민군들은 골짜기로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때 농민군이 넘었던 고개가 ‘솔치고개’와 ‘비행기재’, ‘동창고개’, ‘조룬고개’였을 것이다. 이들 고개는 ‘촉새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으로 서석과 내촌으로 넘나들던 고개였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옛 ‘솔치고개’ 어귀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 능선을 휘휘 돌아 넘던 옛 고개 길이 보인다. 서석, 내면으로 가는 합승버스는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잘도 넘어 다녔다.
가파르고 굽이가 많았던 길이건만 다시 올라보니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길은 칡덩굴과 산딸기, 잔디 등 덩굴식물들이 뒤덮고 있다.
‘솔치’란 이름답게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고 있다.
‘솔치고개’를 오르다보면 비탈면에 잘 정지된 목초지가 있다. 목장의 젖소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풀을 뜯는 이국적인 풍경이 떠올랐지만 홍역처럼 찾아온 우유파동과 사료값 파동으로 문을 닫고, 그 후에 산양을 들여와 산양유 개발에 박차를 가하나 싶더니 지금은 홍천축협에서 직영하는 ‘늘푸름한우목장’이 되었다.
90년대 초에는 홍천축협에서 면양을 들여와 소득증대사업으로 일반농가에 분양하면서 붐을 타기도 했다. 홍천의 산야에 적응력을 기르고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사업으로 시작했다. 홍천에서 처음으로 목장을 연 곳은 ‘장수원 조룬골의 조롱목장’이다.
홍천축협도 산양유 알파인공장을 설립하여 산양유와 유제품을 생산하는 등 활기를 띠면서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하였다. 그때 기르던 유산양은 일반농가에 분양하고 450마리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를 통하여 북한으로 보냈다.
그 후 홍천축협은 늘푸름홍천한우를 명품브랜드로 발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한다.
‘홍천늘푸름한우’는 맛과 품질에서 뛰어난 최고급 한우고급육이다. 청정지역인 홍천에서 사육하는 순수 혈통의 한우(암소)에 고급육 우량형질 숫소의 정액으로 인공수정을 실시하여 생산된 송아지 중 숫송아지는 거세(去勢)하여 생후 27개월 이상 장기 비육한다.
이들 송아지는 홍천군과 강원대학교가 산학협동으로 전국 최초로 개발한 알코올 발효사료를 먹고 ‘홍천늘푸름한우’ 프로그램에 의해 사육되어 생산한 1등급(육질 1등급 이상, 육량 B등급 이상) 이상 판정을 받은 고급육을 생산하게 된다.
솔치 아래 ‘작은둔지’에 홍천축협직영 한우농장에는 200여두의 한우들이 신선한 공기와 차별화된 사료를 통하여 사육되고 있으며, 이 기준에 맞추어 홍천관내의 일반 농장에서도 사육되고 있다.
홍천명품으로 발돋움하는 2006년에는 축산물 브랜드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강원도축산한마당 고급육부문에서는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또한 큰 암소 최우수상과 송아지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고, 2007년에는 농림부가 추진한 쇠고기생산이력추적시스템 시범사업에 참여하여 ‘홍천늘푸름한우’가 농림부와 (사)소비자시민모임으로부터 우수축산물 브랜드로 인정을 받았다. 그 결과 2009년에는 한국지방자치 축산물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
홍천축협 직영 늘푸름한우목장이 자리잡은 곳은 솔치 ‘작은둔지’다. 목장 뒤로 이어지는 산중턱으로 옛 솔치 길이 나있고, 길 위쪽으로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큰둔지’는 길 위쪽의 버덩이다. 옛길의 능선마루는 ‘매봉산(응봉산)’과 ‘촉새봉’을 잇는 능선이다.
옛길을 따라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내려왔다. ‘용막골’과 ‘변비지태골’을 지나면 ‘솔치터널’로 이어지는 국도가 나온다.
‘웃솔치’ 버덩이다. 버덩도 아니면서 버덩이라 한데는 ‘큰둔지’, ‘작은둔지’와 ‘검은골’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합쳐져 버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솔치터널이 뚫리면서 서석과 홍천은 30분 거리의 생활권이 되었다. 솔치터널에서 ‘장평’으로 내려오면서 들꿩 사냥터인 ‘정지골’을 지난다. 지금쯤 새끼를 친 꿩의 병아리들이 날갯짓을 하며 이산저산 풀숲에서 뭔가 찾겠다.
굽이를 돌아 내려오면 ‘토종꿀을 팝니다’라는 안내판이 붙은 농가를 지나 솔치주유소에서 오른쪽 ‘검은골’로 접어들었다.
‘검은골’에서는 언제적의 유물인지 모르지만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 한다. 웃솔치 버덩을 이루는 이곳에서 ‘내촌 새말(장지골)’로 ‘비행기재’가 이어진다. 동국여지도에는 ‘소송치’로 기록되어 있고, 마을에서는 ‘잔솔재’로 부르기도 하는 이 고개는 한때는 동학농민군이 넘나들었고 또 금맥을 찾아 넘기도 하였던 고개다.
지금 ‘비행기재’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한국전쟁 때 비행기가 폭격을 가하여 아군과 적군이 수없이 죽었다하여 붙여졌다 생각된다.
골을 들어서면서 ‘소죽은골’을 지나면 바로 노인요양원이 나온다. 요양원 뒤로는 ‘명박골’이다. 명(목화)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다보면 ‘벚나무선골’과 ‘숯가마골’을 지나 고갯마루에 닿는다. ‘물걸리’와 ‘장야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불자 산과 산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오르는 길도 한참이지만 내려오는 길도 한참이다. 개울에서 세수를 하니 한결 시원하다.
솔치주유소 뒤로 이어지는 ‘고메굴’에서는 금세라도 곰이 뛰어나올 듯하다. 비가 올 듯 잔뜩 흐렸다. 비가 오면 좀 시원하겠다. 다리를 건너면 ‘가산골’이고 아래골짜기가 ‘대장골’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소나무가 우거져있는 사이에 작은 연못과 청주사씨 숭모각, 사기규 효자문이 자리한다.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있다.
‘사기규 효자문’은 고종29년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지으라는 교지를 내려 지어졌다.
사기규는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착한 사람으로 동리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여 병석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용한 의원과 약을 구하여 병을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병환이 깊어 도저히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무명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병석에서 신음하는 아버지의 입속에 넣어 드렸다. 그 후 아버지께서 차츰 나아져 중병을 털고 일어나 오래도록 무병장수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3년간 묘소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여 그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교지를 내렸다.
원래 ‘사기규 효자문’은 1892년 ‘노루터(장평2리)’ 어귀에 세워졌는데 최근에 ‘대장골’로 옮겼다.
‘대장골’은 대장간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옛날 어느 장수가 머물다간 곳이라고도 한다.
옛날 ‘짓골(직골)’에 장수가 태어나 ‘대장골’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서석 어론리 용두안에서 용마가 날아와 장수를 싣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서는 장수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장수가 돌아왔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재혁’이다.
‘사재혁’은 홍천이 낳은 역도선수다. 홍천고교,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현재 강원도청 소속의 현역선수다.
2008년 7월13일 베이징올림픽 역도 남자 77㎏급 경기에서 합계 366㎏(인상 163㎏, 용상 203㎏)을 들어 금메달을 땄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전병관 이후 처음이다. 그 감동의 순간을 돌이켜본다.
사재혁은 용상 2차 시기에서 한국기록과 똑같은 203㎏을 신청했다. 성공하면 금메달이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리훙리(중국)가 합계 366㎏(인상 168㎏, 용상 198㎏)으로 먼저 경기를 끝낸 상태였다. 인상에서 163㎏을 든 사재혁은 리훙리와 같은 기록만 내도 몸무게가 450g이 가벼워 체중차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기합 소리와 함께 바벨을 가슴 위까지 끌어올린 뒤 일어섰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사재혁이 바벨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잠시 비틀거리던 사재혁은 이내 중심을 잡고 멈춰섰다. 3명의 심판이 모두 성공임을 알리는 하얀색 등을 켰다. 바벨을 내던진 사재혁은 환호했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재혁은 자신의 인터넷 미니홈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기구요, 기구가 나이로다. 기구와 내가 하나가 될 때 210㎏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믿느냐? 나도 널 믿는다!”
홈피 제목은 ‘잡초에 꽃을 피우려 …’다.
고난을 딛고 자란 잡초는 마침내 베이징올림픽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대장골’을 나오니 점심때가 한참 지났다.
밥을 사먹을 데도 없고 가게까지 가려니 장터거리까지 가야하고 어디 참 먹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바쁘다.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짓골’은 ‘대장골’ 건너편이다. 골이 깊다. 골이 깊은 골짜기만도 ‘짐치독골(지우릉골, 재피골)’, ‘자랑골’, ‘피난터’, ‘대장목’ 등 많다.
골막의 ‘웃뭇골’ 어귀에는 모대학 총장이 내려와 터를 잡았고 골을 따라 올라가면 ‘자랑골’이다.
‘자랑골’ 뱀박(막침, 마가리, 막창)은 ‘고메단지’이고 능선을 타고 오르면 ‘매봉산’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살면서 삼(대마)을 심어 길쌈을 하였다는 ‘삼밭’둔지는 심마니들이 자주 찾는 골이다.
원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방댐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질재 삼거리’에 ‘칡소바위’가 있다.
‘칡소바위’에는 장수가 태어나 바위 위를 걸어 다녔다는 발자국이 남아 있고, 바위사이로 ‘피난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칡소폭포’를 이룬다. 이 골짜기가 군업천의 시원이라고 한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고 여름 한철 물 맞으러 찾기도 한다. 피난터로 들어서면 몽유도원 같다. 피난터에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이곳으로 피난을 하여 살아남았다고 한다.
‘칡소바위’를 지나면서 ‘질재’다. 고갯길을 따라 ‘대장목’이 나오고 골막으로 들어서서 능선을 오르면 ‘부목재’로, 또 ‘매봉산’으로 이어진다.
‘대장목’으로 들어서면 ‘어론리 이금이’로 나온다고 하는데 이쯤에서 돌아서 내려왔다. 모대학 총장의 안식처를 지나려는데 산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산중턱으로 길을 내고 있다.
‘지우롱골’로 들어서는 어귀의 농가에 들러 냉수 한 사발을 얻어 마시고 돌아서는데 참이나 들자며 라면을 끓인다. 고추를 따다가 방금 들어 왔다고 한다.
‘장평’의 고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살이 많고 연하다. 이를 바탕으로 시장에 낼 때 전국에서 최초로 고추를 선별하여 가지런히 포장하여 높은 등급을 받았다. 그 명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짐치독골’로 들어서면 ‘똥싼골’이 있다. 큰골은 아니나 숲이 우거진 골이다. 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생리현상이지만 마을 청년들 몇이 나무를 하러 이 골짜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큰 짐승(호랑이)을 보고 생똥을 질질 싸면서 돌아내려왔다고 하여 붙여진 골짜기다.
지금도 ‘짓골’에는 큰 짐승들이 가끔씩 나타난다고 한다. 골이 깊고 숲이 우거졌는데 ‘너래밭골’이나 ‘달밭골’로 나물을 뜯으러갔다가 큰 짐승에 놀라 내려오기도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골짜기를 해마다 찾는 까닭은 곰취, 명이나물, 두릅, 고사리 등 산나물이 지천이라고 한다.
마을로 내려오다가 ‘뒷둔지’로 넘어서기 전에 ‘설통바위골’, ‘귀새다리골’이 있다. 물을 끌어 오기 위해 다리를 놓고 귀새를 얹었다 하며 ‘뒷둔지’에는 ‘수봉사’란 절이 있다.
뒷둔지 맞은편은 ‘토끼바위골’이 있고 샛길을 따라 ‘고개집’을 넘으면 ‘나무터(신사무터)’가 나온다.
‘안산’이 감싸고 있는 ‘나무터’를 돌아 나와 ‘장터거리’로 들어섰다.
‘아랫솔치’에는 장터가 두군데 있었다. ‘동창골’, ‘삼밭골’ 어귀의 장터거리와 ‘여내골’ 어귀의 매봉주유소 자리에 장이 섰는데 지금 ‘장터거리’라 부르는 ‘동창골’, ‘삼밭골’ 어귀에는 ‘쇠우전(우시장)’도 섰고 장꾼도 많았다.
장꾼들은 ‘장수원’, ‘어론’ 등지에서 몰려왔고 저녁이면 술에 취해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길을 사이에 두고 주막이 여럿 있었는데 색시를 둔 집은 없었지만 과부가 문을 연 주막집은 늘 손님이 밤새도록 들락거렸다고 한다.
특히 ‘여내골’, ‘사장골’, ‘조롱골’의 중석광산에서 돌을 캐던 인부들이 몰려와 몸 하나 뿐인 주모를 바쁘게 했다고 한다. 아침이면 ‘문안골’ 어귀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아마 술맛보다 더 깊은 정이 오갔으리라.
또 다른 장터는 매봉주유소 뒤편 ‘여내골’과 ‘사장골’에서 중석광을 캐던 인부들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장을 이루었다. 장이라야 국밥장사와 술장사인 주막이었지만 흥청거렸다고 한다.
‘여내골’ 안막에는 ‘광운사’가 있고 지금도 중석을 캐냈던 굴이 그대로 남아있다.
‘동창골’은 지금 공사중이다. ‘장평’과 ‘물걸리’를 잇는 확포장공사다. 개울을 파헤치고 다리를 놓는다.
‘동창골’ 어귀의 이정근(홍천군의원)씨 댁은 방앗간이었다. 보리타작이 끝나고, 또 벼타작이 끝나면 쉬지도 않고 발동기를 돌렸다.
골어귀의 ‘때골(웃때골, 아래때골)’을 지나 오르다보면 ‘구동골’이 있고 다시 고개를 오르다보면 ‘새말’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거기서 ‘소때배기(솟대배기)’를 지나 ‘조룬고개’를 넘으면 ‘내촌 물걸리 조룬’이다.
‘삼밭골’은 ‘동창골’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장터거리’ 뒤쪽 골이다. ‘삼밭골’ 어귀는 둔덕을 이루면서 ‘때골’로 이어지고 골짜기로 들어서면서 ‘최첨지골’, ‘물안골’, ‘승냥간골’, ‘집터골’, ‘조롱골’, ‘절터골’, ‘벙어리골’을 지나 ‘뱀막’인데 ‘등강’을 넘으면 ‘화상대 연못골’ 막창이다.
56번국도에서 서낭당을 지나 내려오면 건봉사 입구 ‘응골(응곡)’이다. ‘응봉산(매봉산)’ 아래 깊은 골짜기다. 골어귀의 ‘장팥’은 군업 ‘군들’로 넘는 고갯길이었고 ‘터골’을 지나면 오른편 기슭에 ‘건봉사’가 있다. ‘닥밭골’을 지나면서 원골인 ‘매뱅이’와 ‘황정골’로 갈라진다.
‘황정골’로 오르다가 ‘중의밭골’을 지나면 뱀막이다. 최근에 화가가 내려와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있다.
‘매뱅이’ 뱀막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 ‘응봉산(매봉산)’ 7부 능선까지 오르는 셈이다.
홍천의 골짜기에는 절골, 절터가 많다. 대부분의 절이나 암자들은 무장공비가 출몰하던 시절 은신처가 된다하여 강제 철거되었고 그 후에 절골이나 절터로 남아있다.
뱀막의 작은 암자도 이 시기에 철거되어 ‘성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응골’ 아래는 ‘여내골버덩’이다. 중석광석을 캐내어 분쇄하던 자리는 지금 매봉주유소 아래가 된다. 또한 그 일대가 광산으로 흥청거렸던 장터다.
‘장터’ 건너편은 개울건너 ‘가래울’로 작은 전원주택과 펜션이 자리하고 있다.
‘촉새봉’과 매봉산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솔치 아랫마을은 넓은 버덩은 없지만 골짜기의 물이 흔해 버덩을 이루고 산에는 향 깊은 송이가 많이 난다.
장평1리 이장 사재문(50)씨는 가을이면 송이가 많이 나 장아찌를 박을 정도라며 송이 체험을 통하여 물 맑고 공기 좋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알릴 계획이라고 한다.
송이철에 연락한다 했으니 올해는 송이 맛 좀 보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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