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울’과 ‘논골’을 하루에 돌아보았지만 가래울로 건너는 섶다리를 쓰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쩔수 없이 논골은 ‘응달떼소’, ‘솔경지’, ‘삼선대’와 함께 떠나는 행선지가 되었다.
답풍리는 큰 단풍나무들이 많다 한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큰 단풍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단풍보다 더 고운 단풍 빛의 나무들이 산과 긴 강가의 한 풍경을 이룬다.
햇살의 풍경이 아름답다.
강을 벗어나 논골로 들어선다. 갈매울을 지나 논골고개를 넘는 길은 길게 산 밑을 돌아 오른다. 특별히 흐르는 물도 없는데 고갯마루에 이르도록 논이 있다. 물이 없는데 논이 있다? 분명 천수답일터인데 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논 자체에서 물이 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을 고논이라 한다. 옛날에는 물이 마르지 않아 벼농사가 잘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기계가 빠져 농사짓기를 꺼린다. 그래서 논바닥을 파고 응고를 놓기도 한다.
논골 고갯마루에 누각이 서있다. 누각이 서있는 고갯마루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누각은 금강역사가 양편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고 그 위 현판이 걸려 있다.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돌아내려 가는데 오른편쪽으로 한옥이 보인다. 아직 단청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공사 중인 듯하다.
‘시방원’이라는 불자들의 수도사원이다. 앞쪽의 한옥은 허씨 문중의 제당이고 그 뒤로 ‘안락전(安樂殿)’을 모셨다. 공사 중인 불전 앞 조립식으로 지은 임시 요사에 들어갔다.
스님을 찾았으나 보살님이 나오신다. 지나다가 큰 건물이 있어 들어왔다고 하자 스님은 공사 중인 대웅전 안에 계신다고 한다. 직접 찾아보겠다며 공사 중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내려와 보살님께 시방원의 내력을 여쭙자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이곳의 큰스님은 이년 전에 가부좌를 한 채 입적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의 당호와 법명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생전에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꺼려했기 때문에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양해를 얻어 불교계에 알려진 사실만 쓰기로 했다.
스님의 법명은 양익이고 당호는 청호당이다.
‘청호당 양익 큰스님(靑昊堂 兩翼大禪師)’은 1934년 9월25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논골5반에서 부친 김해 허씨 수봉옹과 모친 박용보살 사이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탄생했다.
29세 되던 1964년 3월15일에 ‘범어사’에서 ‘동산 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으셨으며, 31세 되던 1964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으셨다.
큰스님은 관법수행에 깊은 관심을 가져, 특히 수행을 통해 온갖 번뇌와 욕심을 떨치고 마침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체계를 세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법화경과 화엄경을 토대로 몸과 마음을 실천적으로 수행해 번뇌를 여의토록 하는 “불교금강영관(대금강승문불무도, 관선무, 선무도)”이란 수행법을 정립하셨다.
큰스님이 체계화한 ‘불무도’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정적인 명상호흡법과 동적인 무술과 유연법을 수련하여 심신을 단련하고 나아가 실천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비전(秘傳) 수행법이다. 즉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무상(無上)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치우침 없고 끊임없이 수행하여 우주적 대아(大我)를 완성하기 위한 수행법인 것이다.
큰스님은 사부대중이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는 사찰인 ‘시방원(十方院)’을 강원도 홍천에 건립하던 중 입적하게 되었다.
믿음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까?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고 자신에게 닿아야 한다. 깨달음이란 시방세계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일어섰다.
논골은 응달떼소, 솔경지, 깨뜰, 삼선대 뒤쪽의 마을이다.
마을마다 가지고 있는 흔한 골짜기이지만 답풍리의 논골은 다른 빛깔을 보여준다. 산세가 아름답다. 가래울의 ‘꽃봉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논골의 뒷산인데 ‘큰등’이다. 그 산에 오르면 ‘사모바위’가 있다한다. 사모란 사모관대의 준말이다. 사모바위를 따라 내려오면 ‘외솔봉’이고 ‘연못골’과 경계를 이루는 ‘모두부치 소상각’이 나온다.
논골에서 가래울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다. ‘천지당골’로 들어서서 ‘산재골’, ‘여우밭골’로 가는 길과 ‘사실고개’를 넘어가는 길, ‘오리골’로 넘어가는 길 등이 있다. 그만큼 가래울과 논골은 왕래가 많았던 이웃 마을이다.
논골에서 물줄기는 ‘지내논골’에서 시작된다. 물은 다랑구지를 돌고 돌아 ‘말등재’ 기슭으로 흘러 ‘삽쟁이’로 나간다.
‘논골’이란 말은 물이 마르지 않는 골짜기라서 자연히 논으로 밖에 해먹을 것이 없었다. 샘이 나 늘 땅은 축축하게 젖었다. 대부분 논골의 논은 고논이나 진펄을 개간하여 일군 논이다. 논 한옆에는 우물 같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맘때쯤이면 물을 퍼내고 미꾸라지를 잡았다.
논골로 들어오는 길은 가래울을 따라 넘는 길만 포장되어 있다. 논골에 들어와 보면 큰 말이 누워있는 형상의 ‘말등재’를 중심으로 다랑구지 논들이 층층 답답이다.
‘배나무고개’를 넘어 ‘웃뭇골’, ‘물안골’로 이어진다. 물안골에서는 ‘삽쟁이어귀’와 ‘깨뜰’로 이어진다. 삽쟁이골에서 연못골로 넘는 고개는 삽쟁이고개이고 어은동으로 빠지는 고개는 우물고개이다. 삽쟁이는 삼선대와 어은동의 경계를 이루는데 논골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다.
삽쟁이란 말은 삽으로 판 듯한 깊은 골이라고도 하고 골이 삽처럼 생겼다하기도 하며, 삽(보습)을 만들던 장이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시방원이 들어서는 ‘양지말’ 아래골은 ‘분토골’이고 그 아래골은 ‘삼선대’로 이어진다.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는 마을인데 돌아서지 못하는 까닭은 마을에 흐르는 순박함 때문이리라.
다시 누각이 서있는 갈매울 고개를 넘어 ‘응달떼소’로 내려간다. 역시 큰 강을 만나야 걷는 기분이 든다.
갈매울에서 응달떼소로 내려가는 길옆에 ‘순대밭골’이 있다. 순대처럼 골이 길다하는데 긴 골은 보이지 않는다. 응달떼소는 강건너 양지떼소 건너편이다.
‘떼소’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뗏목을 매던 곳이다.
홍천의 뗏목은 떼소에서 출발한다. ‘동창’에서 떼를 띄웠다는 이야기는 벌목을 한 나무를 띄워보냈다는 것이고 이곳 떼소에서 떼로 매어 물에 띄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떼소’가 홍천 뗏목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양지떼소’는 주유소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붉은등’이 자리한 배산임수형의 자리다.
양지떼소에서 ‘용포동’쪽으로 내려가면 ‘벼룩재’라는 고개가 있고 ‘벌골’이 있다. 벼룩재 아래는 ‘말구리소’인데, ‘매지골’에서 난 용마가 주인을 잃고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죽은 용마를 건져다 와야초등학교 뒤에 묻었는데 그 후 ‘말무덤’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말구리소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려가 보면 물살이 밑으로 휘감는다. 말은 원래 수영을 잘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물이 휘감아 흐르는 물살에서는 버텨낼 수 없다.
고개에서 흘러내린 바위가 메기들의 집이다. 게다가 장어가 잡힌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여름에는 밤낚시꾼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말구리소 아래에는 보가 있는데 ‘윗보’다. 윗보에서 막은 물은 ‘용포동’으로 들고 ‘경신뜰’까지 흘러간다.
‘용포’는 마을 한가운데 용못이 있었고 물이 휘돌아 나가는 형세가 용을 닮았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갯가에 있어 ‘용갯골’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용못은 답풍리 방앗간이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정작 방앗간 주인은 산의 형상이 용머리를 닮아 용포라고 일러준다. 용포에서 백우산 쪽으로 붙은 마을은 ‘미골’과 ‘숯고개골’이다.
미골로 들어섰다. 아름다울 미(美)골인지 꼬리 미(尾)골인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모른다.
홍천군지에는 미골에 둘레가 2.7m 높이가 8m가 되는 백년 이상 된 소나무가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를 찾아 둘러보며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오른다. 개울물이 졸졸졸 흐른다. 거기가 미골 끝이겠다 싶게 골이 좁아진다. 그 사잇길로 올라서자 아랫말보다 넓은 둔지가 나온다. 산판을 하는 기계톱소리가 들린다.
‘작은미골’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둥바우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큰미골’을 흐른다. 미골 안막에서는 ‘숯고개’로 넘나드는 고개가 있었다. 집집마다 외양간에는 대여섯마리의 소들이 낯선 발자국소리에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일어선다.
미골 어귀에는 퇴골유황오리집이 있다. 주인에게 이 골짜기가 퇴골이냐고 물으니 ‘보리밭골’이라 한다.
미골에서 ‘오형제고개’ 쪽으로 내려오면 ‘숯고개골’이다. 어귀에 텅 빈 군부대가 있다. 마을에 흉물로 남아있는 건물 뒤로 마을안길이 나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예배당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흘러나온다.
‘숯고개’에는 숯을 구운 곳이 없다하는데 숯고개라 이름 지은 것은 숯을 지고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이란다. 큰 강이 있어 아마도 뗏목에 실어 한양으로 띄워 보내지 않았나 여겨진다.
숯고개 어귀에는 조경용 숲을 가꾼 정원이 있다. ‘터골’, ‘덕두리’, ‘승지골’을 지나 숯고개를 오르면 동광복지법인에서 운영하는 ‘해뜨는 집’이 자리한다. 장애인들이 고샅길에 들꽃을 심어 산책로로 삼고 온실에서는 힘을 모아 꽃을 가꾸어 시장으로 낸다고 한다.
숯고개를 넘으면 두촌면 ‘천현리’다. 고갯들머리 오른쪽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방재골’이다. 방재골로 오르면 마을에서 한 여인을 사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총각으로 살다죽었다는 ‘총각골’이 나온다.
숯고개골과 미골사이에 진잔등(긴 능선)이 큰길까지 발을 뻗고있다. 이 등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고 툭 불거진 봉우리를 ‘용머리’라고 한다.
돌아내려오다가 족대(반도)와 지렛대를 메고 계곡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도 많지 않은데 무슨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니 ‘물토끼’를 잡으러 간다고 한다. 물토끼? 개구리를 그렇게 부른단다.
‘용포동’은 꽤 넓은 뜰이다.
용포에서 ‘깨뜰’로 건너가는 다리가 놓여있고 ‘새보’ 아래 강가에는 펜션이 자리한다.
보에서 넘쳐흐르는 물이 바위사이를 헤집는다. 물은 바위에 부대끼며 맑은 소리를 낸다. 바위는 물을 치켜 올리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에 비낀 햇살은 무지개를 띄워놓는다. 순간순간 살아 꿈틀대는 상생의 아름다움이다.
펜션을 지나 ‘경신뜰’로 가려했으나 정말 길이 없다. 강물은 길을 만들며 ‘가목소’를 이루고 산 밑을 돌아 ‘삼선대’ 앞을 지난다. 강 건너 삼선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용포동 다리를 건넜다.
길은 깨뜰 한가운데를 지나 ‘솔경지’로 오르는 길과 ‘삼선대’로 가는 길로 갈라진다. 솔경지는 원래 ‘송정지(松亭地)’이다.
소나무 정자 고송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지만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있다. 오른편으로 돌아들어 삼선대로 간다.
삼선대는 가목소 건너편의 아담한 마을이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논골’에 이어지는 비탈진 구릉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지만 세 장승이 날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삼선대’, ‘삼성당’, ‘삼상당’이라 부른다. 막상 들어가 보니 좀 황량하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는 길도 밭으로 끊겨있고 빈집들도 보인다.
삼선당과 깨뜰 사이에는 나지막한 봉우리가 있다. 그 봉우리에서 삼선당이란 이름이 유래된다. 쌀이 귀했던 시절 허씨 문중에서 봉우리를 허물고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관청에서 원상복구 하라고 하여 봉토를 하고 나무를 심었는데, 그 후 마을에서는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은 강가의 언덕에 펜션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특히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 건너 편엔 옥녀가 경대봉을 앞에 놓고 머리를 감는 형국의 가목소가 있고, 한여름 밤엔 강가에 펼쳐진 백사장에 누워 반짝반짝 꼬리불을 켜고 짝을 찾아 날아다니는 개똥벌레(반딧불이)를 만날 수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명당이란 사람의 따뜻한 기운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돌아 윗길로 들어서니 비탈진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삽쟁이’ 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더 이상 갈 수 없다. 앞으로는 강이 가로막고 산 밑으로는 절벽이다. 절벽사이로 ‘삽쟁이골’이 보인다. 삽쟁이골로 들어서면 겨우 지나다닐 고샅길이 나온다.
한때 ‘삼선대’에서 ‘삽쟁이’와 ‘논골’을 넘어가려면 ‘우물고개’에서 한 숨 돌리고 지나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논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강으로 흘러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골짜기가 되었다.
‘삽쟁이’를 건너 ‘어은동’으로 들어선다.
글·사진 허 림(시인)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