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57]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아직 이른 초겨울 무심히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누구인가. 또 왜 사는가?’ 결국은 자문자답이다. 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들을 가끔은 해볼 것이다. 올여름 무더위가 극심했다는 기상청의 얘기가 있었다. 없는 자에게는 그래도 추운 겨울보다는 여름이 한결 낫다고들 한다. 겨울은 추위 때문에 난방을 해야 하지만 여름은 냉방시설이 없어도 그런대로 참고 살면 겨울보다는 우선 생활비가 덜 들어간다. 

아침으로는 산새와 들새소리가 하루의 아침을 연다. 누구든지 조건 없이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슬며시 간다. 죽는다는 것은 공평하다. 권력이 있든 없든 재력이 많든 적든 명예가 있든 없든 간에 때가 되면 스스럼없이 하늘나라로 간다. 허긴 하늘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종교(신앙)를 가진 자는 절체절명의 신앙심으로 천당이나 극락을 찾아 열심히 기도하고 좋은 일들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무신론자들은 어떨까? 그들도 은연중에 하늘이 있다 없다를 확인하기 전에 우선 하느님을 찾는다. 여기서 하느님은 특정 종교에서 찾는 주님(메시아, 여호아) 즉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런 하느님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사는가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필자가 늘 사용하는 고사성어에 있는 ‘생노병사’에 ‘희노애락’ 하다 가는 게 인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 또한 이 범주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생에 정답은 없다. 사는 대로 살면 되지 하는 체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그래도 사는 데까지 멋지게 살아보자 하는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만으로는 80대 초반이고 우리나라 나이로는 여든 두 살이다. 살만큼 산 나이다. 아픔도 많았고 영광도 많았다.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로 시골(농촌)에서 태어나 위로 두 명의 누나와 부모님 5식구가 비록 가난했지만 단란하게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에 홍천중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시골에서 아주 이사를 한 것이다. 홍천농고 상과를 졸업하고 1960~67년까지 홍천에서 최초로 보습학원(현재의 입시학원)을 개원 운영하다가 농협은행중앙회 공채에 합격해 농협은행 직원이 됐다.

중학교 때는 표어 짓기를 해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를 2학년 때 지었고 그 후 성인이 돼서는 1992년 환경표어로 ‘오염은 한순간 정화는 한평생’을 지어 당선됐다. 이외 10여 편의 표어가 당선된바 있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을 한다고 책을 많이 읽었고 1990년에 문예지 등단과 금융인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23세 때 혼인을 해 1남 2녀를 뒀는데 장남은 중앙대 의대 졸업 후 현재 정형외과 의사로 경기도 시흥에 살고 큰딸은 역시 중앙대 유아교육과와 대학원 졸업 후 대전에서 유아교육에 종사하고 있으며 사위는 카이스트 교수다. 막내딸은 덕성여대 유아교육과와 교원대 대학원을 나와 서울에서 초등학교병설유치원 원감으로 있다. 필자는 30년 다니던 직장을 1997년 홍천군청농협지점장으로 퇴직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필자 이력의 전부이자 외형적인 내 인생으로 인생여로의 세 단계 중 마지막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살기위해 살고 죽지 못해 산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자문자답 해보지만 역시 뾰족한 답이 없다. 그냥 사는 거다. 다만 하루하루를 명분 있게 찰라와 순간의 연속 속에 일상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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