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48]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지난달 필자는 김광섭 홍천장로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두툼한 책을 한권 받았다. 내용을 간추리면 1950년대 초 홍천에서 선교활동과 병원을 운영한 미국인 선교사 드와이트로메이 발스베리(한국이름 마두원)에 대한 선교행적과 그의 일대기 및 신앙에 대한 철학 등 의미 있는 책으로 김광섭 전민수 목사님이 공동저자였다.

필자가 마두원 선교사를 처음 본 것은 1954년 초여름 희망리 석화산자락(현 명동보육원) 가건물과 천막 등이 있는 곳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 14살로 친구들과 같이 들렀다가 친구(박윤근)의 누나가 교회에 가면서 우리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노트가 귀할 때인데 일주일에 몇 번씩 가면 노트도 나눠주고 초콜릿과 사탕도 주면서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가 그곳에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거주하고 있었다.

그 당시 홍천에는 병원이 두 개가 있었는데 6.25전란 전에는 지금의 홍천주유소 근처에 있었고 또 하나는 현 중화각 식당 인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기억이 확실치 않고 전 홍천뭔화원장 김종은(89세) 님과 원로 선배인 조명환(90세) 님의 증언에 의해 위치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전란 중인 1950~53년까지는 간판을 단 병원을 보지 못했고 1954년 이후는 지금의 우체국 동쪽 100m지점과 희망리 성당 동남쪽 사거리 현 영빈장모텔 앞 한식건물에 의원이 있었다. 의원이래야 의사 1명과 간호사 1인의 아주 소규모 의원이었다. 그러다 1953년 휴전 직전 희망리에 제이드병원이 마두원 선교사에 의해 개원했다.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병원이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유추컨대 그곳 땅이 퇴거일본인 적산지역으로 임자가 확실치 않고 넓은 공터여서 세워진 것 같다. 가건물에 천막 몇 개가 전부였다. 그래도 밤에는 자가발전기로 전기불도 들어오고 환가가 붐볐다.

1954년 초여름 필자 동창의 누나가 현 장로교회 터에 흙벽돌 교회도 직접 지었다. 약 2~30여 평을 지었는데 흙벽돌은 현지에서 만들었다. 친구의 누나와 교인들이 직접 벽돌을 찍고 우리들이 날라줬다. 교회는 규모가 작지만 아담하게 짓고 첫 예배를 봤는데 마두원 선교사도 동참을 했고 그 후에 제이드병원이 두촌면 자은리(현 두촌중학교 북동쪽 야산 언덕)로 이전하고 몇 년간 운영하다 병원은 문을 닫고 교회는 계속 이어져 왔다.

저서에 의하면 마두원 선교사는 두촌에 있다가 서울로 간 후 경기도에서 선종하고 일산에 묘를 썼으나 개발로 인해 묘지를 장로교회 산인 홍천읍 삼마치에 이장했다고 한다. 마두원 선교사는 원래 음악인으로 미국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으며 선교만이 아니라 음악 발전과 교육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서울의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을 세우고 부산 등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미국인으로서 연세대학을 설립한 언더우드 박사에 버금가는 종교인이요 교육자며 예술(음악)인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 황토흙벽돌 20~30여 평짜리 교회도 철거하고 목조로 제법 큰 교회가 지어졌다. 그 교회(현 제일장로교회)가 읍사무소 인근 동쪽 코너에 있다가 도시개발로 이주를 하고 희망리 교회 터에는 당시 유행했던 박태선 장로의 소위 감람나무교회가 왔다. 그러다 그 교회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 현 희망교회가 설립됐다가 교세가 커지자 인근 소규모 돈사와 포도밭 일부 등을 매수해 현재의 웅장한 교회로 성장했다. 불과 5~60여 년 전의 일이다.

요즘 홍천에서는 희망장로교회 김광섭 목사님을 위시한 몇몇 목사님들이 홍천에 최초로 병원다운 병원을 설립해 의술을 펴고 교회 선교에 헌신한 마두원 선교사에 대한 선양사업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인이면서도 한국이 어려울 때 홍천에 의술과 선교를 펼친 그 공로를 어떤 형식으로라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선행을 베푼 이국인 마두원 선교사에 대한 공로를 다시 한 번 생각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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