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눈[27]

▲민경철시인/화가/사업가/홍천문인협회 회원전 대한육상경기연맹 심판위원
▲민경철시인/화가/사업가/홍천문인협회 회원전 대한육상경기연맹 심판위원

가을이다. 결실의 계절이자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위한 대비를 해야하는 시간이다. 가을하면 추석이다. 꽉 찬 보름달처럼 무르익어 가는 벼와 과실들….그리고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훈훈하게 남아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 준다. 

어린시절 가을 풍경은 이랬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제일 먼저 방앗간에서는 물레방아 찧는 소리가 요란해 진다. 시골에선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잠자리떼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네마다 전 부치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진동하고, 식혜와 수정과를 끓이는 공기가 향긋했다. 길에 고추를 따서 따가운 가을 햇볕에 말리는 풍경은 너무나도 흔했다. 

뚝방에선 연을 날리고 제기 차기, 고무줄 놀이, 자치기, 구슬치기, 말타기 등등으로 정신 없이 바쁜 아이들의 모습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알록달록한 한복을 차려입은 가족들이 선물 보따리들을 들고 반갑게 부모와 일가 친척집을 방문하는 모습도 참 당연한 것이었더랬다.

명절 준비는 가족들의 산행이 필수였다. 바구니 집게 막대기 등 각각 도구들을 챙겨간다. 아버지나 큰형이 밤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흔들고,양동이나 바구니를 쓰고 기다리던 아이들이 떨어진 밤송이들을 신발로 밟거나 나뭇가지로 눌러서 알밤을 꺼낸다. 한 쪽에서는 깨끗한 솔잎을 조심스레 따고 집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었다. 솔잎을 깐 찜통에서 익혀 참기름에 굴린 송편이 커다란 함지에 모인다. 터진 것들은 아이들 몫이다. 방금 쪄서 한김 빠진 따뜻한 송편에 새로 짠 참기름 향이 솔솔 나면서 정말 맛있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어른들도 참 행복해 보였다.

예전에는 참으로 낭만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리두기를 마치 미덕인양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려서 사람들 사이가 멀어졌다. 대도시에서는 24시간 동안 엠뷸런스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명절은 뒷전이 되어 언제 추석이 지나 갔는지 모르고 사는 각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더 행복했고 좀 더 순수하고 진실하고 정이 넘치는 때는 역시 옛날이었지 않나 싶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니, 그래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의 자세가 중요한 것 같다.

30대 젊은 날의 추석하면 잊을 수 없는 일화를 추억해본다. 추석을 17일 앞두고 선물세트 장사에 푹 빠져 17일간 집에도 안들어가고 밤을 지새우며 장사했던 이야기다. 명절을 앞두고 판매도 바쁜데 선물세트는 받아서 신속하게 진열해야 하고 회전과 창고와의 동선,인력 배치 등이 심각한 고민이었다. 생각 끝에 가게 앞 우측 단독주택 담벼락을 빌려 쓰기로 했다. 가까운 곳이라 꺼내 팔기도 좋고, 대량 판매도 신속하니 평소보다 엄청난 물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낮에는 물건 받을 시간이 없어 저녁 시간에 매일 몇차씩 받아 쌓아 놓고 팔았다. 

24시간 영업하니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거래처 수퍼들이 원하는 시간에 거래할 수 있었으니 그들도 신이나 물건을 싣고 가곤 했다. 돈을 벌었다기 보다 낙엽처럼 긁어 모았다. 셀 시간이 없어 자루에 담아 집에 가져가 식구들 모두 동원해 지폐를 세고 다음날 은행에 입금하기를 보름 가까이 반복하고 25평 아파트 한채를 사는 기적을 이뤘다. 차후 재건축을 거쳐 43평 아파트로 업그레이드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에 몇 번 만나기 힘든 기적이다. 

80년대 호경기에는 그렇게 돈 번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물살을 타지 못하고 기회를 놓친 이들은 많은 후회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산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오늘의 시간, 오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 감사하며 후회 없을 소중한 추석을 맞이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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