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홍천읍에서 동쪽으로 약 3km쯤 가면 여우고개가 있다. 44번국도변에 비석 하나가 외로이 서있다. 이 비석은 1951년 동란 때 후퇴를 하던 국군장교와 사병들이 인민군에 의해 저격당한 곳이다. 

당시 결운리와 와동리 쪽에서 내려오던 인민군과 홍천읍에서 삼마치고개 쪽으로 후퇴하던 국군이 삼마치고개가 이미 적군의 손에 들어가자 동면 쪽으로 우회해 원주로 후퇴하던 1개 중대의 부대를 인솔한 정용식 대위는 부관 김재명 중위와 운전병이 탄 지프차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중대 전원을 안전하게 성수리 쪽으로 후퇴시키고 맨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정 대위 일행은 인민군 저격수의 집중사격에 의거 정 대위가 전사하고 이어 부관인 김재명 중위는 차에서 내려 후퇴했고 운전병은 이괄봉 쪽으로 피하다가 역시 적군에 의해 피살됐다. 

이러한 사연을 새긴 비석이 여우고개 정상에 서있다. 1950년대 말에 작은 화강암 비석을 철거하고 60년대에 새로 세웠다가 역시 철거한 후 세 번째로 만든 비석이 현재의 비석이다. 최초의 비석은 전사한 정 소령의 부관이 세웠고 그 다음은 역시 부관이 사령관(대장)이 된 후 다시 세웠다. 현재의 비석은 육군 차원에서 다시 세웠으며 그 주변도 정비했다. 

1.4후퇴 당시 인근 동면 덕치리에 살던 윤명열(82세) 씨는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저격당한 중대장 정 대위의 시신은 인민군들이 지나간 뒤 임시로 도로변에 가매장했다가 봄에 공동묘지로 이전했고 운전병은 이괄봉 능선에 매장을 했다. 

휴전이 되고 곧 중대장은 다시 공동묘지에서 육군묘지로 이장을 했다. 당시 부관인 김 중위는 원대 복귀해 많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육군의 최고봉인 대장까지 승진했으며 1군사령관 시절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별 승진한 고 정 소령을 상급자로서의 최고의 예우를 잊지 않았다. 

1.4후퇴 당시 교전시점에서 제일 가깝게 살던 박윤구(83, 작고) 옹의 증언에 따르면 지프차에서 사살된 정 대위 시신을 자기네 집 뒤(도로변) 아카시아숲 속에 버렸던 것을 인민군들이 지나간 뒤에 자기 부친 등 마을의 어른들이 임시 가매장했다고 말했다. 

운전병 시신은 10여 년 전 육군유해발굴단에서 발굴 작업을 했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 매장에 참여했던 마을사람과 발굴단에 최초 보고했던 필자도 참여) 발굴단에 의하면 60여 년이 지났으면 임시매장으로 보아 훼손됐을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현재 유해발굴은 중단하고 정 소령 비석만 당시의 참혹한 비극을 말해주는 듯 서있다. 

여우고개는 홍천읍과 동면 경계에서 3~400m쯤 되는 길옆에 있다. 요즘 이 근처에 있던 조선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이괄 장군에 대한 역사성과 전설적 이야기 이괄의 말 무덤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제기되어 활발한 연구가 향토문화 차원에서 조사되고 있다. 

정 소령 비석에서 남서쪽 500여m쯤 덕치천변 30여m쯤에 있었다. 현재는 답 가운데로 그 흔적조차 없다. 1970년 중반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경지정리 때 말 무덤 자체를 해체시키고 그 돌들은 제방에 방치했다.

필자는 학창시절과 성인이 돼서도 10여 차례 이상 현지를 답사한바 있다. 말 무덤 자체는 높이가 약 2~3m정도 되고 바닥이 4~5m쯤 되지 않았나 기억된다. 여우고개 비석에서 서쪽 1km쯤에 있는 성수리에는 육군 장군 즉 별이 6개가 나온 마을이다. 형 민경준이 두 개로 소장이고  동생 민경배가 별 4개였다.

 그 뒷산은 이괄 장군이 군사훈련을 했다는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오는가 하면 이괄봉 능선일대는 70년대만 해도 병영에서 썼던 호롱불 유물과 석성을 쌓던 큰 돌들이 있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박기연, 87세 증언).

영서의 고사찰 수타사를 가는 길목으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에 70여 년 전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국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충혼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정 소령의 영면을 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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