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

보육원생들은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에서 퇴소하여 사회로 나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달랑 5백만 원을 손에 들고 사회에 나온다. 보육원은 원래 고아원의 전 명칭이다. 부모나 일가친척이 없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나 사회단체에서 만든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다. 우리나라는 1950년 6.25 전란을 기점으로 많은 고아들이 있었다. 우리 홍천만 해도 1950년 초부터 홍천 동면 수타사 주지스님이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한두 명씩 돌보기 시작한 것이 현재 명동보육원(홍천읍 희망리 소재)의 시초다(이 내용은 이미 언급한바 있음). 

물론 고아들은 돌봐줄 어른들이 없어서 버려진 영아나 청소년들을 자립할 때까지 보살피고 키워주는 시설이다. 이들 중에는 아예 전쟁으로 인해 부모가 사망하거나 실종된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부모가 멀쩡히 있어도 살기가 너무 힘들고 가난해서 잠시 고아 아닌 고아생활을 했던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불우한 어린이들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때는 수타사 고아원 원생이 140여 명에 달했었다. 1953년 휴전 후 수타사에서 속초리로 고아원을 옮기면서 자립의 기반을 잡고 원장도 허만훈(현 군수의 조부) 전 도의회 의장이 맡아서 운영했다. 

고아 출신 중 필자의 지인이 3명 있었는데 그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0여 년 간을 보육원에서 자랐다. 이들은 본인이 원하면 대부분 고등학교까지 보내줬다. 필자의 동창 중에는 서울에서 은행(당시 제일은행) 지점장까지 한 자도 있고 청량리 기차역장을 한 자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간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목사님 인테리어 건축업자 사업가 등등 나름대로 사회에 나와서 훌륭한 직장을 갖고 열심히 산 자들이 많다. 퇴소를 앞둔 본인들은 특단의 각오를 하고 퇴소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힘든 일도 해야 한다. 원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인으로서 버젓한 구성원들이 많았다.

며칠 전 중앙지에 어느 보육원생이 만 18세가 되자 보육원을 떠나 사회의 첫걸음을 딛고 일어서기도 전에 스스로 극단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아픈 기사를 읽었다. 그는 보육원에 어려서부터 입소해 초·중·고를 졸업하고 퇴소 나이가 되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퇴소했다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봤다. 하나는 원생 스스로의 자수성가에 대한 기초가 약했던 것 같고 또 한 가지는 사회적 제도와 보육원의 보호규정에 보다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했다. 

한사람의 인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먼저 자신이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까지 근 20여년을 보육원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다가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사회는 극심한 경쟁과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부모와 친척이 있는 자들도 막상 부모 곁을 떠나면 막막한 생존경쟁의 세계가 눈앞에 있는데 하물며 고아 출신들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스스로 먹여 살리고 보호해주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다. 일자리도 스스로 찾아서 취업해야 하고 독립된 성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 보육원에서 단련된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은 사치로 여기고 당장 밥벌이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80여만 명이나 와있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줄었지만 어쨌든 간에 일자리가 외국에 비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최저임금과 주52시간제의 근로조건이 법으로 정해졌다. 농촌은 일손이 부족하고 구직난 보다 구인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이 많다. 최저임금만 받아도 약 월2백여만 원이다. 3D직업이니 농사일이니 가릴 게 없다. 젊어서 이런저런 일 다해봐야 한다. 편한 직장이란 건 없다. 국가나 사회단체나 중소기업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월급을 주는 곳은 이 세상에 한 곳도 없다. 내 스스로 일을 해야 한다. 죽기 살기로 하면 못할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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