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서 방송인 겸 작가로 활동해 온 일본인 사유리 씨가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결혼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아 정자를 기증받은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은 비혼모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행법상 허용이 되지 않아 일본에 가서 아이를 출산했다고 한다. 

사유리 씨의 비혼모는 국내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아버지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현상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나뉘기도 했다. 유교적인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의 정서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기증 받은 정자의 정체를 알 수 없을 뿐이지 정자를 기증한 남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생물학적으로는 기증자가 아버지인 셈이다. 

사유리 씨의 비혼모는 부모와 자녀라는 가족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결혼으로 시작해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됐다. 다양한 삶의 방식 중 하나라는 생각도 있다. 혼숙, 혼방 등의 용어가 생기는 등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전환이 되는 것이 오늘날 모습이다. 

인구절벽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출산율이 저조한 요즘 젊은이들의 아이 낳지 않기 추세에 따르면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아이 낳는 기계가 등장하리란 상상이 가능해진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신생아가 만들어지므로 기계로 만든 사이보그는 아니지만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는 대단히 극찬할만한 일이다.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낳아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아이는 소장품이 아니다.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으로 태어나면 사람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바른 인성을 지녀야 한다. 교육적인 관점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생리학적으로 음양의 이치에 따라 남녀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다음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바람직한 모습이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남자의 정자를 제공받아 아이를 낳아 엄마로서 양육한다는 것은 곧 총각도 난자를 제공받아 아이를 낳고 아버지로서 양육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결손가정의 학생들이다. ‘문제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라는 말이 학교 현장에 있는 이유다. 조손가정의 학생들도 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통계학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가정 체계에서 아버지는 자녀 양육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예전에는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를 가리켜 ‘호래자식’이라고도 했다. 버르장머리 없이 성장했다는 이유에서다. 오랜 경험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계신 안정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가 비교적 바르게 큰다.

최근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키는 아동학대 관련 뉴스들도 정상적인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보다 그렇지 않은 부모가 양육하는 가정에서의 발생 빈도수가 훨씬 높다. 계부와 계모 또는 입양하여 양육하는 가정에서 정상적인 부모가 양육하는 가정보다 아동학대 및 가정폭력이 더 많이 일어나곤 한다. 

가뜩이나 인성교육의 부재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해 걱정이다. 각종 패륜범죄는 물론 흉폭한 사회범죄가 급증하는 추세를 보면 인간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최근 묻지마 폭력, 살인 등이 자주 발생하곤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겪어야 할 심리적 갈등이 충분히 예상된다. 외국에는 정자은행이 있다. DNA 검사를 통해 우수한 정자와 건강한 난자의 조합은 인류의 품종 개량이 가능해진다. 신의 영역에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과학적 도전의 끝이 어딘지 궁금하다.

이영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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