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8]

상좌상이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 가지고 뒷면에 빳빳한 대지를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어 왔던 모양이다. 그림을 그런대로 그렸는데 얼른 시제를 붙이지 못한다거나 시제야 생각했다손 치더라도 붓글씨에 자신이 없어 전문가를 찾는다. 좋은 그림에 좋은 시제 혹은 일필휘지의 글씨는 그림의 품격을 올려주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날 저문 강가에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 그늘진 양 언덕에 남은 붉은 여뀌꽃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題尙左相畫鴈軸(제상좌상화안축) / 양곡 소세양
날 저문 강가에는 외로운 그림자에
그늘진 양 언덕엔 붉그레한 여뀌 꽃
모르리! 만 겹의 구름이 차마 알지 못하리.
蕭蕭孤影暮江潯   紅蓼花殘兩岸陰
소소고영모강심   홍료화잔양안음
謾向西風呼舊侶   不知雲水萬重深
만향서풍호구려   부지운수만중심

잘 알지를 못하겠네, 구름과 물이 만 겹인 것을(題尙左相畫鴈軸)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1486~1562)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날 저문 강가에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 / 그늘진 양 언덕에 남은 붉은 여뀌꽃 있네 // 하염없이 가을바람 향하여 옛 친구 불러보지만 / 잘 알지를 못하겠네, 구름과 물이 만 겹인 것을]이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상좌상 두루마리 기러기 그림에 시제를 붙여]로 번역된다. 상좌상은 불교에 관련된 스님의 품위에 맞는 지위인 듯하지만 여기에서는 법명法名으로 생각코자 한다. 날 저문 강가에 낯설지 않은 기러기가 우두커니 서서 옛 친구를 불러보는 그림의 앞에 알 수 없는 막힘이 그 뜻을 미처 전달하지 못하겠다는 화제를 일구어냈을 것이다.

시인은 두루마리로 된 기러기 그림을 보고 있다. 강가에 외로운 기러기 그림자에 붉은 꽃으로 피어난 여뀌꽃에 취하는 모습이 시상의 얼개에 아련하게 비춰진다. 날 저문 강가에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자 하나, 그늘진 양 언덕엔 남아 있는 붉은 여뀌꽃이 있었다는 시상이 훤히 보인다. 그림 속에 나타난 선경으로는 이어진 후정後情이란 튼튼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어진 화자는 서산을 응시하며 옛 친구이자 단짝인 정인情人을 불러본다. 그리고 한 마디를 토로해 낸다. 하염없이 가을바람을 향하여 옛 친구를 불러보는데 알지 못하겠다는 부정의 뜻을 표현하더니만 구름과 물이 만 겹인 것을 이제야 알겠다는 시상이다. 겹이 두터워 친구가 아마 들을 수 없겠다는 뜻이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쓸쓸한 강가 그림자 붉은 여뀌 양 언덕에, 가을바람 친구 불러 구름과 물 만 겹인 걸’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1486~156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 급제하였고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형조, 이조, 호조, 병조 판서를 거쳤다. 수찬에 재직할 때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에 이장하게 한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蕭蕭: 소소하다. 孤影: 외로운 그림자. 暮江潯:: 날 저문 저녁 강. 紅蓼: 붉은 여뀌. 花殘: 꽃이 시들다. 兩岸陰: 양 언덕이 그늘지다. // 謾向: 하염없이 ~을 향하다. 西風: 서풍. 呼舊侶: 옛 친구를 부르다. 不知: ~을 알지 못하다. 雲水: 구름과 물. 萬重深: 일만 겹이 두텁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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