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6]

사대부들 문화는 누정이 중심이었다. 흥얼거리는 가운데 운자를 냈고, 그 운자에 따라 나이 연만한 어른이나 시상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 ‘원운시原韻詩’ 한 조각을 털어 내놓는다. 누정에 앉았던 선비들이 이 글을 듣거나 돌려 읽고 다음 시를 지었으니 이것이 ‘차운시次韻詩’다. 원운과 차운시를 통해 주고 받은 일은 생활화 되었다. 국화가 달빛에 어리어 멀리 비추고 있고, 그 고운 빛 맑고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次李擇之韻(차이택지운) / 읍취헌 박은
국화에 달빛이 어리어 비추고
맑고 순박하여 더럽지 않았는데
밤새워 시상 잠기어 잠 못 들어 하노라.
菊花渾被月    淸純自無邪
국화혼피월    청순자무사
終夜不能寢    解添詩課多
종야불능침    해첨시과다

하염없이 떠오른 시상에 과다하여 잠겼답니다(次李擇之韻)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1479~150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국화가 달빛에 어리어 멀리 비추고 있고 / 그 고운 빛 맑고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았네 // (눈에 아른거려) 밤새도록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 하염없이 떠오른 시상이 과다하여 잠겼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이택지의 운을 차운하며]로 번역된다. 이택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시인과는 가깝게 지낸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시인이 앉아 한 쪽은 원운에 의하고, 다른 한 쪽은 차운했던 모양이다. 운자는 [邪]와 [多]였으며, 시상은 국화를 보면서 차마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음으로 이끌어 냈다. 두 시인이 같은 시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계절은 소소한 가을이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국화가 순박하여 더럽히지 않는 순박함 속에서 자기를 비춰보는 겸허한 시간 속에 깊은 시심을 묻으면서 시를 끌어안은 시간을 가졌겠다. 국화를 향하여 달빛이 어리어 비추고 있으니, 그 맑고 순박함을 더럽지 않았다고 했다. 국화처럼 그렇게 자기를 투영하는 선경의 시통주머니는 늘 채워져 있어서 열어 보였다.

화자는 국화를 바라보면서 잠까지 못 이루면서 깊은 시상에 잠겼음을 열어 보인다. 국화가 눈에 아른거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떠오른 시상에 잠겨 있었다는 시심 주머니다. 시인은 국화 한 송이를 보고 시심이란 이렇게 열어 보이는 것이란 본보기를 보이며 자신을 투영시키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달빛 국화 멀리 비춰 고운 빛은 순박하네, 밤새도록 잠 못 이뤄 너무 넘친 시상과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읍취헌(邑翠軒) 박은(朴誾:1479~1504)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음취헌은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한다. 17세에 진사가 되었고, 1496년(연산군 2) 18세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던 총명한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菊花: 국화. 渾: 어리다. 被月: 비추다. 달의 힘에 의지하다. 淸純: 맑고 순박하다. 自無邪: 절로 사특하지 않다. // 終夜: 밤새도록. 不能寢: 능히 잠을 자지 못하다. 解添: 더하여 풀다. 잠기다. 詩課多: 시가 과다하다. 많은 시를 생각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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