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1]

통합예술이라고 했던가. 선현들은 재주는 시서화詩書畵를 같이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시상이 흐르는 내용으로 보아 그림을 원만하게 그려놓고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면서 며칠을 고심했던 장면도 만난다. 뿐만 아니라 저명한 인사에게 시제 써주기를 부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림을 그려놓고 고심한 끝에 시제를 붙이면서 가을바람 속에서 단풍잎은 누렇게 물들고, 청산에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題畵扇(제화선) / 월산대군 이정
가을바람 단풍잎에 청산에 해는 지고
강남은 아물아물 어딘가 알 수 없는데
노 저어 떠나는 배는 느릿느릿 가누나.
黃葉秋風裏    靑山落照時
황엽추풍이    청산낙조시
江南渺何處    一棹去遲遲
강남묘하처    일도거지지

노를 젓는 배만 느릿느릿 떠가는구나(題畵扇)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1454~1488)으로 왕족 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가을바람 속에서 단풍잎은 누렇게 물들고 / 청산에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이구나 // 강남은 지금 아물아물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고 / 노를 젓는 배만 느릿느릿 떠가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부채에 그림을 그려놓고 화제를 쓰다]로 번역된다. 시인의 대체적인 시적인 성향은 오언절구에 자연시가 많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시상이 드러난다. 우리 선현들은 대체적으로 시서화詩書畵에 능수능란했다. 시를 잘하는 사람은 글씨도 잘 썼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그림 솜씨까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군주사회라는 사회적인 배경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개인의 성취동기에 따른 부단한 노력이었겠다.

시인은 가을 단풍의 풍류를 즐기더니만, 청산의 해를 시상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둔다.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서 단풍잎은 이제 누렇게 물들고, 청산엔 뉘엿뉘엿 해가 지는 때라고 했다. 어서 가을걷이를 준비하라고, 어서 따스한 보금자리에 들라고 손목을 부여잡고 재촉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화자는 다음 해에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찾아올 강남의 방향감각을 잊고 배가 유유히 떠가고 있다는 게으름의 후정을 담기에 분주하다. 강남은 아물아물 어느 곳인지 알 수 없고, 노 젓는 배만이 느릿느릿 떠가고 있다는 시정詩情 한 사발을 담아냈다. 작은 정도 정이라 했듯이 정감어린 오뚝함을 살피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단풍잎은 물이 들고 청산에는 해가 지고, 어느 곳이 강남인지 노를 저어 떠나가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풍월정(風月亭) 이정(李婷:1454~1489)으로 월산대군으로 알려진 왕족출신 풍류시인이다. 1468년(예종 1) 동생인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다시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어 전지, 노비 등을 하사받았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黃葉: 누런 잎. 단풍을 뜻함. 秋風裏: 가을바람이 부는 가운데(속에). 靑山: 청산. 落照時: 해가 지고 있을 즈음에. // 江南: 강남. 渺: 묘연하다. 何處: 어느 곳. 一棹: 하나의 노. 곧 노를 젓는다는 뜻. 去遲遲: 더디게 가는구나, 느릿느릿 가고 있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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