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대도시 가구를 빼고는 대부분 가정에서 김장을 담근다. 한국인에게는 겨울김치가 반양식이란 말도 있다. 그렇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김치에 대해서는 기고 10여 년 간에 두서너 번 쓴바가 있다. 

오늘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일찍 오는 전화는 대개 특별하거나 긴급한 전화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그러려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지인한테서 온 전화다. 어제 김장을 해서 한통 가져가려고 하는데 몇 시에 도착하면 좋겠느냐는 전화였다. 우선 반가웠다. 어제 한 햇김치를 준다니 웬만한 정성이 아니고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 지인은 약속시간에 햇김치와 총각김치를 들고 왔다. 고맙고 감사했다. 

서울에 살다가 귀향한 그 친구는 중학교 동창이다. 그는 홍중을 졸업하고 춘고로 유학 후 서울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정년퇴직 후 귀향했다. 자녀들은 다 훌륭히 자라서 외지에 살고 두 내외만 옛 고향 산자락에 아담한 토담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상적인 삶이다. 김치선물을 받은 난 답례품이 없어 생각 끝에 도서 몇 권과 해산물(다시마) 한 톳을 줬다. 지인이 안 받으려는 것을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거듭 당부하며 반강제로 줘 보냈다. 

나도 아내가 있을 때는 김장을 많이 했다.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이웃의 몇몇 집이 모여서 새벽부터 야단들이다. 전날 저녁에는 무를 씻어 채를 썰고 깍두기거리를 썰었다. 물론 나도 한몫을 거들었다. 이튿날은 배추를 절이고 한쪽에서는 속을 버무리고 넣고 했다. 그리고는 아들네 딸네 동생(처제)네에 한 박스씩 보냈다. 처음에는 화물로 보내다가 그 다음엔 택배로 보냈다. 아내가 떠나간 후에 우리 집에서는 김장이란 큰 행사가 없어졌다. 한 가족사에 끊겨진 김장문화를 생각하니 애잔한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난 곳은 시골이었다. 14살까지 살았으니 유년시절을 거의 다 보낸 셈이다. 집안은 가난했다. 대다수 농가가 그렇듯이 겨울 김장담그기가 큰 행사였다. 긴긴 겨울 반찬으로 김치가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추위가 유난히 빨리 왔던 것 같다. 어머니는 찬물에 배추를 절이고 씻고 하는데 손이 시려서 뜨거운 물을 떠다놓고 손을 담가가며 김장을 했다. 김칫독은 마당 근처나 뒤란에 파고 낟가리를 씌웠다. 보통 서너 독쯤 된 것 같다. 김치나 깍두기 막김치 동치미 등을 땅을 파고 보관했다. 이듬해 봄까지 변치 않고 맛이 잘 들었다. 

요즘 같은 김치냉장고는 아예 없었다. 서민의 겨울 반찬은 김치 하나면 해결됐다. 김칫국 볶음 찌개 김치밥 등이었다. 과학의 발달은 음식문화에도 예외가 아니다. 김치를 보관하는 항아리가 없어지고 김치냉장고로 대치됐다. 이제 김치는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화가 되고 있다. 7~80년대만 해도 김치를 먹으면 냄새가 난다고 피하던 외국인들도 요즘은 김치를 많이 먹는다. 발효음식으로 김치만한 게 없다고 한다. 김치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를 제거하고 서양화된 김치를 개발한다고도 한다. 

허나 김치는 김치다. 시금털털한 냄새가 나야 김치다. 일본에서는 기무치라고 해서 우리 고유의 김치를 흉내 내 만들었으나 얼마 못가서 우리 김치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한다. 한국의 김치는 어떠한 가미도 필요 없다. 외국의 식품연구학자들은 김치야 말로 최고의 건강식품이라고 한다. 채소를 발효시켜 과학적으로 인정된 우리의 고유식품이 세계를 휩쓸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김치의 맛은 집집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도 각자의 독특한 맛이 있다고 한다. 이웃들이 모여서 품앗이와 두레로 하고 시골이나 소도시의 어머니들이 정성껏 담가 도시의 자녀들에게 보내주는 김치는 김치라기보다는 마음을 듬뿍 담아 귀여운 자녀들에게 보내는 정성의 겨울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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