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0]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이다. 서얼 출신 검서관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추사는 송석원시사의 좌장 천수경의 부탁으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예서체로 ‘松石園’ 석 자를 써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한 역관 오경석, 이상적, 화원 조희룡을 제자로 삼았고 최고 걸작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한다. 푸른 버들 드린 사이로 꾀꼬리가 노래하니, 동호의 옛 낚시터가 한없이 그립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登松石園(등송석원)[2] / 사영 김병기
골목에 아지랑이 희미하게 쌓이고
언제나 해질 무렵 마음이 상하는데
버들에 꾀꼬리 노래 한없이 그립구나.
萬境依迷煙靄積    一生怊悵夕陽來
만경의미연애적    일생초창석양래
垂楊拂水幽鶯囀    夢在東湖舊釣臺
수양불수유앵전    몽재동호구조대

언제나 해질 무렵엔 마음 자주 상하게 되느니(登松石園2)로 제목을 붙여 본 율(律)의 후구인 칠언율시다. 작가는 사영(思穎) 김병기(金炳冀:1818~1875)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골목에는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쌓였는데 / 언제나 해질 무렵엔 마음 자주 상하게 되느니 // 푸른 버들 드린 사이로 꾀꼬리가 노래하니 / 동호의 옛 낚시터가 한없이 그립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송석원에 오르면서2]로 번역된다.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전구에서는 [맑은 시내 맑은 그늘 경개 좋고 시원한데 / 지는 꽃 어지러이 창태 위에 수를 놓구나 // 일 년의 좋은 봄빛 어디로 다 돌아갔나 / 이 자리 모인 분들 즐겁게 마셔 보세나]라고 했다.

시인은 골목 아지랑이가 해질 무렵에 마음 상하게 한다는 선정先情을 점유해 보이고 있다. 골목에는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쌓였는데, 언제나 해질 무렵엔 마음 자주 상하게 된다고 했다. 남아있던 아지랑이가 골목을 빠져 나가는데 방해를 부리긴 부렸던 모양이다.

화자는 꾀꼬리의 노랫소리만 나면 낚시터를 찾아 유유자적한 자연 속에 파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푸른 버들 드린 사이로 꾀꼬리가 노래하고 있으니 동호의 옛 낚시터가 한없이 그립다고 했다. 낚시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즐기는 것만이 아니고,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에 수양을 삼는 좋은 보약이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아지랑이 희미하게 해질 무렵 마음 상해, 꾀꼬리가 노래하니 옛 낚시터 그립구나’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사영(思穎) 김병기(金炳冀:1818~1875)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안동김씨 세도가 한창일 때 몰락왕족으로 파락호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과도 교류하며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도운 관계로, 뒷날 안동김씨 일족이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萬境: 골목. 依迷: 희미하다. 煙靄積: 아지랑이가 쌓이다. 연기와 놀이 쌓이다. 一生: 일생. 怊悵: 섭섭하고 서글프다. 夕陽來: 석양이 오다(돼다). // 垂楊: 버들이 드리우다. 拂水: 물을 떨치다. 幽鶯囀: 꾀꼬리가 노래하다. 夢: 꿈속에서. 在東湖: 동쪽 호수에 있다. 舊釣臺: 옛적의 낚시터.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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