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58]

김종직 문인으로 강직하게 살아온 흔적이 높은 만큼 시문도 강직해 보인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푸른 부들과 보리가 익는 맥추(麥秋) 그 이름대로 누렇게 익은 보리를 회화적으로 그린 묘미가 있는 듯하다. 땅 이름인 화개(花開)는 꽃이 핀다는 뜻이기에 푸른 부들, 누런 보리와 어우러져 산뜻한 색채감을 더한다. 바람이 하늘하늘 푸른 부들을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사월 달 화개 고을은 보리 이미 거둘 때였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遊頭流到花開縣(유두류도화개현) / 일두 정여창
바람이 부들 풀을 가볍게 희롱하고
사월 달 화개고을 보리를 거둘 때에
두류산 천만첩 보고 큰 강을 내려가네.
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풍포렵렵롱경유    사월화개맥이추
看盡頭流千萬疊    孤帆又下大江流
간진두류천만첩    고범우하대강류

한 척의 돛단배로 또 큰 강 따라 내려간다네(遊頭流到花開縣)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바람이 하늘하늘 부들 풀을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 사월 달 화개 고을은 보리 이미 거둘 때였네 // 두류산 천만첩을 다 구경하고 나서는 / 한 척의 돛단배로 또 큰 강 따라 내려간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두류산을 유람하다 화개현에 이르다]로 번역된다. 두류산은 전남북과 경남 등 삼도에 걸쳐 신선이 살았다는 명산이다. 지리산은 삼신산의 하나로 중국 전설의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방장산·영주산으로 이곳에 신선과 불사약과 황금·백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지리산은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란다.

시인은 부들 풀 부드러움의 희롱과 화개마을 보리 이삭을 생각하면서 선경의 시상을 곱게 엮어냈다, 바람이 하늘하늘 부들 풀을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고 있는데, 사월 달 화개 고을은 보리 이미 거둘 때라는 시상이다. 봄 머리에서 성장물들이 기지개를 쪽 펴면서 풍요로움과 고마움을 담아내는 그런 계절의 노래 한 사발이겠다.

화자는 천만 겹의 두류산 구경에 이어서 만들어 낸 섬진강이나 낙동강을 따라 돛단배로 내려갔다는 시적인 관광을 즐긴다. 두류산 천만첩을 다 구경하고 나서는 한 척의 돛단배로 또 큰 강 따라 내려간다고 했으니. 꽃피는 두류산 고을은 산이 주는 이미지처럼 마음의 구경거리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부들 풀 희롱하면서 화개고을 보리 거둬 두류만첩 구경하며 큰 강 따라 돛단배로’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던 인물이다.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진수잡저>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문집에 <일두유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한자와 어구】
頭流: 두류산, 즉 지리산(智異山). 風: 바람. 蒲: 부들 풀. 獵獵: 하늘하늘. 弄輕柔: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다. 四月: 사월. 花開: 꽃이 피다. 麥已秋: 보리를 이미 거두다. // 看盡: 다 구경하다. 頭流: 두류산. 千萬疊: 천만 겹. 孤帆: 외로운 돛단 배. 又下: 또 내리다. 大江流: 큰 강 따라 흐르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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