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53]

시 한 편으로 정승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을 꾸몄다. 아버지가 정승을 만나러 간 이야기며 그래서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그런 사실을 명함에 써두었던 일 등은 어쩌면 정승의 마음을 깨우치는 동기가 되었다. 다행이 이를 제목으로 붙이지 못한 사실도 지적한다. 정승은 단잠 깊어 해가 높다랗게 올랐는데, 문 앞에선 명함 종이를 피도록 만지고만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無題(무제) / 추계 윤효손
정승의 단밤 깊어 해는 올랐는데
앞에선 명함 종이 피도록 만지고
꿈속에 밥을 토하고 주공 만남 말하리.
相國酣眠日正高  門前刺紙已生毛
상국감면일정고    문전자지이생모
夢中若見周公聖  須問當年吐握勞
몽중약견주공성    수문당년토악로

만일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게 된다면(無題)으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1431~150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정승은 단잠 깊어 해가 높다랗게 올랐는데 / 문 앞에선 명함 종이를 피도록 만지고만 있네 // 만일 꿈속에 주공周公을 만나게 되었다면 / 그 당시 밥을 토하고 머리 쥔 채 손님 만나던 일 말했으리]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제목을 붙이지 못함]으로 번역된다. 시와 관련된 지봉유설 [혼취昏娶]에 나오는 일화 한 편이 있다. ‘윤효손 아비가 의정부 녹사가 되어 이른 새벽에 상공의 집에 가서 명함을 내놓고 뵙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하고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말을 들은 효손은 아비 명함 끝에 위 시문을 써 두었다.’

위와 같은 사연을 담았기에 시인은 정승의 단잠과 사연을 담은 편지가 펴지도록 만졌다는 시상을 일으켰다. 정승은 단잠이 깊어 해가 높다랗게 올랐는데, 문 앞에선 명함 종이가 피도록 만지고만 있었다. 가상한 현실 앞에 세태를 돌아본다.

화자는 주공에 얽힌 고사 하나를 인용하며 정승에게 부탁하려는 뜻을 담았다. 만일 꿈속에 주공을 만난다면, 밥을 토하고 머리 쥔 채 손님 만나던 일을 말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그 아비는 그 정승을 만나러 가는데 부지중 어제 가지고 갔던 명함을 그대로 내놓았다. 명함을 들여다본 상공은 자초지종을 물어 사실을 안 후 효손을 불러 크게 칭찬했다. 상공은 마침내 그 딸을 효손에게 시집보내고, 효손은 과거에 급제하여 판서에 이르렀다는 고사 같은 이야기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정승 단잠 해가 깊어 명함 종이 만지고만, 꿈속 주공 만난다면 손님 만난 일 말하리’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1431~1503)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으로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전농주부를 지냈다. 호조 참의, 형조 참판, 대사헌,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경국대전오례의주>, <성종실록>을 수찬하였던 인물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한자와 어구】
相國: 정승. 酣眠: 낮잠이 깊다. 日正高: 해가 높다랗게 올랐다. 門前: 문 앞. 刺紙: 명함 종이. 已生毛: 이미 펴지게 했다, // 夢中: 꿈 가운데. 若見: 만약 보다. 周公聖: 주공이 성인. 須問: 모름지기 묻다. 當年: 당년에 금방. 吐: 토하다. 握勞: 수중의 수고로움.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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