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추수를 하면 그 곡식을 찧는 방아가 있었다. 지난번 칼럼에서는 물레방아에 대하여 쓴바 있는데 기왕이면 사람이나 짐승(우마)을 이용한 농경문화의 한 부분인 디딜방아나 연자방아에 대한 이야기도 써보기로 했다. 방아의 역사는 우리조상들이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어서 낟알을 생산하고 그 곡식을 식량으로 만들기 위해 최초로 만든 것이 방아일 것이다.

방아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절구가 있었다. 절구는 큰 나무를 토막을 내 가운데를 파낸 후(절구통이라 했다) 곡식을 그곳에 넣고 절구대(나무토막을 적당한 굵기로 다듬은 큰 막대)로 사람의 손을 이용해 곡식을 찧는 방법이다. 그 후 한 계단 올라간 게 발 디딜방아다. 이 디딜방아는 큰 나무를 잘라 머리에 방아공이를 박고 끝 쪽에서 발로 눌러서 찧는 외방아가 있었다. 

그 후 머리는 그대로 두고 끝부분이 갈라진 나무를 이용해(Y자 가지나무) 둘이서 찧을 수 있는 발방아로 발전됐다. 절구는 그 모양이 위에서 말했듯이 나무통으로 된 것도 있고 돌로 된 것도 있다. 주로 산간농촌지역에서는 나무로 된 것이 많고 들과 섬이 많은 곳은 돌절구를 많이 사용했다. 이 절구는 집집마다 거의 다 있었고 발방아는 한동네 몇 집을 빼고는 역시 다 있었다.  

연자방아는 대농(부잣집)가에 주로 있었는데 몇 개 마을에 한해서 두 서너 개씩 있었다. 이 연자방아도 인력 즉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큰 돌을 돌리는 법과 소나 말(나귀)을 이용해서 돌렸는데 많은 곡식을 찧을 때 사용했다. 절구는 많이 변형돼서 그 규모가 소형화됐고 돌절구는 물론 쇠절구도 나와 지금도 주방그릇점포에서는 현대화된 소형 절구를 팔고 있다. 

발 디딜방아는 1970년대 초까지 마을에 더러 남아 있었으나 요즘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큰 절구나 발방아 연자방아 후속으로 나온 것이 발동기(원동기라고도 함) 방아였다. 큰 동네는 한 마을에 방앗간이라고 해서 한곳씩 있었고 작은 동네(마을)는 이동식으로 가을추수가 끝나면 마을별로 순회를 하며 벼를 찧었다. 이 원동기는 초창기 때는 목탄이나 숯 나무 등을 태워서 가스를 폭발시켜 그 힘으로 원동기를 돌렸으나 힘이 약해서 자꾸 중단되고는 했다. 그 후에 나온 것이 석유(등유)를 이용해서 발동기를 돌렸다. 

큰 동네의 방앗간은 그 동네에서 웬만큼 잘 사는 사람들이 방아주인들이었다. 현재는 매우 큰 동네에만 방앗간이 있고 대부분은 없어졌고 그 대신 지역농협에서 운영하는 RPC정미소가 생겨 농민 대부분이 가을추수 후 즉시 물벼(생벼)를 기계로 건조시켜 백미를 생산하고 있다.

연자방아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동면 좌운리 강모씨네 마당에 밑돌이 있고 역시 동면 삼현리에 밑돌이 있다고 한다. 윗 맷돌은 새마을사업 당시 밭에 묻거나 깨서 돌담이나 주춧돌 등으로 썼다고 하며 현재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벼를 찧는 쌀방아는 소형으로 만들어져 집에서 쌀이 필요할 때 마다 그때그때 소량만 찧어 먹기에 늘 햅쌀 맛을 낸다는 가정도 늘고 있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은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벼를 쌀로 만드는 가공기술도 밥맛을 내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6천여 년 역사 중 보릿고개를 해결한 60~70년대의 통일벼 재배와 지금은 그 수확량이 통일벼와 비슷하면서도 맛이 좋은 우량 품종들이 많이 나와서 쌀만은 자급자족하고도 남는 세상이 됐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연 60kg 정도의 소비지만 주식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다. 따라서 향후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방법도 무한히 발전될 것이고 이미 있었던 기구들은 우리 농경문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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