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인류의 문명과 물은 불가분의 관계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물을 이용해서 현재까지 문명생활에 기여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데는 수분이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니 물이 생명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하겠다. 

아마도 원시시대나 그 후 구석기 신석기 중석기 등의 시대에는 흐르는 물(하천이나 강)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물의 힘을 이용해서 농사나 생활에 필요한 힘을 얻는데 썼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전기가 발견되고 그 전기를 일으키기 위해 물의 힘을 이용한 것이 수력발전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후버댐과 이집트의 나일강 댐 중국의 양쯔강 댐 우리나라 압록강에 있는 수풍댐이 있고 남한에는 세계최초로 축조된 춘천 소양강의 소양강댐(사력댐)이 있다. 홍천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경기도 가평군 청평댐이 일제강점기 말에 지어졌다. 청평댐의 어로가 없어서 홍천강(화양강)에 그 많던 뱀장어가 못 올라온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까지도 청평 북한강에서 마곡리와 노일을 지나는 소금배가 올라와 홍천 화촌면 구성포 앞까지 왕래했다고 한다. 일종의 수륙교통수단의 하나다. 홍천의 물방아는 마을 마다 한두 개가 있었다. 

물방아는 세 종류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물의 낙차의 힘을 이용한 수레바퀴를 돌려서 방아를 찧었다(후에 개량돼서 피대나 톱니를 이용도 했다). 동네에 상시 개울물이 없는 곳은 물방아를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런 곳에는 수통방아를 만들어 장마 때 일시적으로 물을 이용해서 방아를 사용했다. 홍천은 동면 삼현리에 5~60년대까지도 이 수통방아가 있다가 없어졌다. 

지역출신인 신양식(작고 전 군의원) 옹이 수통방아 전래 노랫소리로 강원도 민속놀이대회서 상을 받기도 했다. 삼현리는 큰 개울이 없고 도랑물만 있는데 장마 때 물을 이용해 커다란 나무를 이용해 하단에 물통을 파고 그 곳에 물을 흘려 채우면 하부가 무거워 내려가면 물이 일시에 빠지고 머리가 내려오는 일종의 반복 작용으로 방아공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곡식을 찧는 것이다. 이 물통방아는 마을에 평야가 많고 하천이 없는 곳에서 사용했다. 즉 물의 낙차를 이용할 수 없는 곳의 물방아다. 

또 한 종류는 낙차가 없고 센 물살이 많이 흘러 바퀴물방아를 못 만드는 곳에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방법인데 규모가 큰 하천변에 있었고 주로 흐르는 센 물살을 이용해 물방아를 돌렸다고 하는 물살방아인데 필자는 보지 못해 귀동냥에 의할 뿐이고 직접 있었는지 조차 확인할 길이 없으나 60년대 내촌면 답풍리에 있었다고 한다.

홍천읍의 물방아는 현 갈마곡리(닭바위) 화양강변에 있었다. 홍천교서 사미정 쪽(여중이나 비행장 방향) 약 50m쯤 현 홍천강염소탕 식당 앞 강변에 있었다. 1960년 초까지 있다가 철거됐다. 이곳은 닭바위 들의 봇물줄기(검율리서부터 수로가 있음)를 이용해 낙차가 제법 높았다. 개량 물방아로 존속하다가 인근 나룻배 나루터와 함께 없어졌다. 나루터 자리에는 다리가 놓였고 물방아는 결국 인근 정미소에 흡수된 상태다. 그 당시에는 닭바위 들에서 나는 많은 곡식을 독점해서 찧었다. 

물방아에 대한 필자의 기억에는 옛 유년시절의 시골 물방아가 떠오른다. 홍천 동면과 횡성 공근면 상동리 첫내마을 입구와 그 아래쪽으로도 2개가 있었고 상동리 어영골에 1개 봇들마을 끝에 1개 돌부채거리 중심마을 원영길 집 앞에도 있었다(홍천군에는 각 면이나 동네마다 몇 개씩 있었다).

농경문화와 밀접한 물레방아는 지금은 그 존재 자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조상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지치고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물방아가 힘차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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