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수년 전 홍천신문에 게재됐던 필자의 칼럼을 보고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찾게 돼 고맙다는 스마트폰의 메시지 한통을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지난 5월14일 오후 필자의 핸드폰에 문자가 한통 왔다. 서울에 사는 중년 여성으로 아이 둘을 키우며 홍대거리에서 병원을 개원한 의사이고 30여 년 전 의과대학을 다닐 때 많은 도움을 준 의인을 찾는데 찾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홍천신문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홍천뉴스”에서 필자의 글을 읽고 필자가 홍천에 살고 그가 찾고자 하는 분의 얘기를 다룬 글을 보고 그의 소식이나 주소(전화)를 알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필자는 그가 찾고자 하는 지인의 소식이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타인의 인적사항(주소나 전화 등)을 알려주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배될 뿐더러 본인의 의사 없이 함부로 알려줄 수 없어 일단 메시지를 보낸 분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전화는 즉시 통화가 됐다. 

그는 어떤 면에서 필자 보다 더 상세히 그 친구의 가정사와 개인 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녀가 4명인데 2남2녀이고 이름은 OOO으로 처가가 강릉이며 처가집안이 교육계에 몸담았던 분이신데 다 작고했으며 찾고자 하는 분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흉부외과 전문의이고 부인은 현모양처로 모범가족이며 1980년대 말쯤 홍천에서 병원을 개원했다가 자녀교육 문제로 서울로 이주한 것 등등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한양대 의예과를 다닐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학업을 중단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곤궁할 때 이들 부부가 도움을 많이 줘서 의대를 끝까지 졸업할 수 있었고 그 뒤로 소식과 안부를 전하며 지냈는데 20여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겨 지금까지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았으나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인 은인을 찾고자 성당 쪽으로도 문의를 했으나 늘 헛고생만 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의 진정성 있는 전화내용으로 봐서 지인의 동의 없이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좋겠다고 판단이 돼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루가 지난 15일 오후 역시 문자가 왔다. 찾고자 하는 당사자와 전화통화를 했고 곧 찾아뵐 예정이라고 했다. 필자의 지인 측에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처음엔 놀랐다고 하고 뒤이어 별일도 아니었는데 잊지 않고 안부를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그 홍천친구가 그런 글을 써서 만나게 되어 오히려 쑥스럽고 민망하나 일단은 고맙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많다. 어떤 도움을 받으면 그때만 고마워하고 일정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잊어먹기 일쑤고 오히려 은인을 배반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생긴 말이 “검은 머리 짐승을 도와주면 오히려 해코지 한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세상이 아닌가. 

하여튼 홍천신문(홍천뉴스)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았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신문이란 원래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고 사회적 논란거리에 대하여 비평이나 평판도 해주고 이런저런 기사나 기고문을 통해 지역사회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언론이다. 한 지역을 담당하는 도 단위나 전국지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독자들의 궁금증과 갑갑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역할도 해야 하는 게 언론이다.
신문의 정기적인 기고(칼럼)는 쓸 얘기는 많은데 막상 쓰고자 하면 무엇을 쓸 건가 망설이게 된다. 시대적 변화와 정치적 이슈 일상생활의 과거와 현재 미래 등 그때그때 맞춰서 글을 쓰게 된다. 쓰는 자도 그렇지만 편집하는 쪽에서도 고심을 많이 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번 인쇄된 내용은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기사를 볼지 아무도 모른다. 위의 내용처럼 홍천신문으로 인해 오랫동안 찾고 싶은 은인도 찾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보도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