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32]

상당한 수준에 있는 화가나 화가를 지망하는 생도들도 그림을 그려놓고 선뜻 화제를 붙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질의 그림도 중요하겠지만 좋은 화제는 그 그림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4-5자 되지 않는 화제는 물론 화제를 부연하는 연구聯句인 두 줄짜리 시까지도 마찬가지다. 먹 못에서 용이 일어나 비가 부슬부슬한데, 돌은 달아나고 강물은 뒤집히고 하늘에 귀신 우는 듯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題柳少年山水圖(제유소년산수도) / 양촌 권근
못에서 용 일어나 가랑비는 부슬 한데
돌 달아나 강물 뒤집혀 귀신이 우는 듯
바람에 천지 개이며 흉중에 조화 있네.
墨池龍起雨濛濛    石走江翻鬼泣空
묵지룡기우몽몽    석주강번귀읍공
一陣好風天地霽    分明元化在胸中
일진호풍천지제    분명원화재흉중

분명 나의 흉중에는 큰 조화가 있을 법하기는 하네(題柳少年山水圖)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먹 못에서 용이 일어나 비가 부슬부슬한데 / 돌은 달아나고 강물은 뒤집히고 하늘에 귀신 우는 듯 // 한 무더기 좋은 바람에 천지가 맑게 개이니 / 분명 나의 흉중에 큰 조화가 있을 법하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유씨 소년의 산수도에 제목을 붙여주면서]로 번역된다. 이 시를 읽으면 다음과 같은 시인의 교훈적인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시인은 어떤 소년이 산수화를 그리는 장면을 보고 그림을 통해 드러난 소년의 재주는 물론 큰 뜻에 대해 칭찬하는 내용을 담았을 것이라는 시적 배경을 시상의 그림에 담아본다.

시인은 소년의 그림 속에서 다음과 같은 시상의 멋을 간추려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화폭 속에 담겨진 그림은 먹 못에서 용이 일어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돌은 달아나고 강물은 뒤집히고 하늘에선 귀신이 우는 듯하다는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시상으로 한 폭의 그림을 잘도 그렸기 때문이다.

다시 이어지는 시인의 입을 빌은 화자는 더 큰 시심의 모습을 그려 화제로 담아 일필휘지一筆揮之를 써주었을 것이다. 한 무더기 좋은 바람에 천지가 말끔하게 개더니만 이는 분명 흉중胸中에 큰 조화가 있으리라는 후정의 시상을 모두 쏟아냈다. 소년이 붓을 그어 갈 때마다 종이에서는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장면이 나타나고, 시인은 이를 보면서 소년의 큰 포부를 칭찬한 내용을 담았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먹 못 용이 일어나서 하늘 귀신 우는 듯이, 좋은 바람 천지 맑고 흉중 조화 있을 듯도’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1권 2부 外 참조]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이다. 영해, 흥해, 김해 등지로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

【한자와 어구】
墨池: 벼루에 갈아 놓은 먹물, 여기서 龍은 붓을 말함. 龍起: 용이 일어나다. 雨: 비. 濛濛: (비가)부슬부슬 내리다. 石走: 돌이 달아나다. 江翻: 강이 뒤집히다. 鬼泣空: 귀신이 울다. // 一陣: 한 무더기. 好風: 좋은 바람. 天地霽: 천지가 개다. 날씨가 맑다. 分明: 분명. 元化: 조화. 在胸中: 가슴 속에 있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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