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지난달 초 미국에 사는 지인(동창)한테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물론 이 친구의 편지는 일 년에 두서너 번 받는다. 그 외는 수십 년 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전화와 스마트폰이 발달된 후부터는 아예 편지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안부편지라든가 소식을 전하는 편지들은 더욱 자취를 감췄다. 우편배달부가 오긴 매일 오지만 편지가 아니고 고지서라든가 안내서 홍보물 등이고 마음의 정이 듬뿍 담긴 편지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이는 비록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편지의 역사는 오래 됐다. 아마도 글씨가 생기고 바로 편지가 생겼을 것이다. 형식이야 많이 변했겠지만 종이에 소식을 써서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해 서로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이는 신라나 백제 고구려 그 후 고려 조선시대를 두루 거치면서 오늘의 편지라는 개념의 소식지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인 편지(우정사업)에 대한 발달은 구한말 일본을 통해 정식으로 우정사업이 시작됐다. 우편과 전보(전신)는 개화기인 갑오개혁 때 이미 편지제도가 있었고 우정국도 세워졌다. 1950~60년경만 해도 편지가 주요 연락방법이었다. 바쁜 일로 시간을 다투는 일이야 전보 전화를 사용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우편을 통했다.

그 우편의 큰 업무가 편지다. 편지는 단순히 소식만 전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담아서 오가는 것이다. 6.25한국전쟁 때는 위문편지를 써서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장병에게 보냈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썼지만 개인들 간에도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젊은이들이 정분을 나누는 애틋한 내용도 편지로 전했다. 그 뿐인가 군대에 간 아들한테서 편지가 오면 글을 모르는 문맹의 부모들은 편지를 읽지 못하고 쓰지도 못해 우체부나 선생님 이장들을 통해서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썼다고 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할 그 시절 그 때 우리 어버이들의 애환이었다.

필자도 편지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게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기위해 동분서주할 무렵 노부모님들이 결혼을 독촉하는 마당에 마땅한 여자 친구도 없었다. 그런데 지인의 잔칫날(동네서 전통혼례식) 신부의 친구가 마음에 끌려 사귀어보려고 편지를 썼다가 소위 퇴짜를 맞았다. 내가 최초로 딱지를 맞은 사건이었다. 물론 그 규수는 후에 결혼을 했고 나 또한 몇 년 후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잊고 살았지만 편지하면 아련히 떠오르는 꿈속 같은 즐거운 추억의 한토막이다. 편지에 관한 사연은 또 하나 있다. 필자는 책이나 신문 등 웬만한 물건들은 당장은 쓰지 않더라도 모아두는 습관(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쁨)이 있다. 때문에 학교 때부터 직장에 들어와서 수년간 모아두었던 편지와 스크랩 등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창고정리를 할 때 아내가 모두 버렸다.

지금은 편지가 오지도 않을뿐더러 옛 추억을 더듬어 아름다운 사건들을 회상할 편지 또한 없다. 지금 생각해도 70여 년 전 우체부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 또 빈집에 편지가 와있을 때 그 설레는 마음은 참으로 좋았다. 어쩌다 여자 친구한테서라도 편지가 오면 뜯어보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누가 볼까봐 사방을 둘러보기도 했다. 내용이야 그저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편지는 왜 그리 마냥 좋았는지. 아마 상대편들도 내 편지를 그렇게 받고 읽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토막이다.

편지는 마음의 상징이다.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게 아니다. 며칠 전 미국 지인(박준업)의 편지 또한 그랬다. 타이틀이 우선 학생 때의 별명으로부터 시작해 지나간 얘기와 현실에 매달린 아름다운 소식들이다. 격식을 건너뛰어 하고픈 진지한 얘기들로 가득 차있다. 이번 편지에도 두어 장의 매수에 이런저런 일상의 얘기들로 가득 차있고 곁들여 미국 동포신문에 발표된 지인의 수필 두 편이 동봉됐다. 역시나 마음을 전하는 소식은 편지만한 게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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