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우리나라 100여년의 영화 역사상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상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수상했다. 미국 LA 할리우드에서 지난 2월10일 세계의 영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4개 부문을 수상했다. 그동안 남녀 주연배우상과 조연상 등 유럽 쪽 칸영화제 등에서는 많이 받았지만 미국에서 오스카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봉준호 감독 작품인 기생충은 한국의 서민생활을 영화한 작품으로 이날은 우리나라 영화계 최고의 날이다. 나운규가 최초로 아리랑이라는 무성영화를 만든 후 100여년이 지나서 세계 최고의 영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번 상에는 감독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을 한꺼번에 받았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영화사를 새로 써야 할 판이다. 특히 그동안 백인들의 세상인 듯 백인들만의 수상이었는데 동양인이 이렇게 한꺼번에 수상을 한 것은 세계 영화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들 한다.

우리나라 영화 기생충과 끝까지 경쟁을 벌였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을 내용으로 한 전쟁영화로 1917이라는 제목의 영화다. 발표 직전까지도 아무도 모르게 경쟁했고 무기명 비밀투표로 수상작을 결정했다고 한다. 특히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 중 “이번 상을 다섯으로 쪼개서 여럿이 나눠 갖고 싶다”라고 하고 또 자기가 존경하는 배우와 감독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존경의 뜻을 표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며 축하를 했다.

요즘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중국발 우한 폐렴(코로나19) 전염병으로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는데 모처럼 시원한 해외소식이 전해져 영화예술인들은 물론 온 국민이 산뜻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영화는 원래 활동사진이라고 해서 미국의 에디슨이 최초로 발명했다. 처음에는 무성으로 배우들이 움직이기만 했고 음성은 없었다. 그 대신 변사라고 해서 화면을 보고 대사를 구성지게 잘 표현해 일제강점기 때는 인기 직업이 되기도 했다.

필자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54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천막을 치고 상영한 리버티뉴스 영화였다. 그 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무성에서 유성(성우들의 대역목소리)으로 대사를 넣고 배우들은 입만 중얼거렸다. 그 후 동시녹음 촬영이 됐고 이어 흑백화면에서 총천연색 칼라로 제작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색(칼라)영화는 춘향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1950년대 말에는 미국영화가 한국 극장을 메웠다. 서울엔 단성사 우미관 등 극장에서 상영했고 홍천은 현재 공공 유료주차장으로 활용 중인 신장대리 터에 홍천문화관이 있어 연극과 각종 모임 영화 상영 등을 했는데 2016년경 철거를 해서 홍천군민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당시 미국영화로 필자의 기억에 남는 몇 편을 보면 존 웨인 주연의 바다와 노인 외 서부활극과 전쟁과 평화 대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개리 쿠퍼 주연) 파리의 휴일 OK목장의 결투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등 수많은 영화가 상영됐다. 우리나라 영화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김승호 주연의 마부 로맨스파파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전쟁영화로 피아골 세계에서도 주목받았던 씨받이 맨발의 청춘 등등 많았다.

영상문화 중 최초의 대중매체가 된 영화는 영사기 필름에서 이제는 디지털로 전환돼 발전이 계속되고 있으나 TV나 스마트폰 인터넷 등과 치열한 싸움에서 얼마나 더 견딜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화는 스크린을 통한 종합예술로서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예술성이 있어 앞으로도 영화관객들은 늘어날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영화인들이 활동했고 또 많은 배우와 제작자들이 작고했다. 비록 세월은 흘렀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영화산업이 바야흐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이번의 아카데미 같은 세계적인 큰 상을 받게 됐다. 영화 기생충 제작진들과 함께 온 국민이 기뻐해야 할 큰 경사라 하겠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