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며칠 전 중고등학교 때 매우 가까이 지내던 동창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올해 팔순을 끝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요즘 나이로 치면 조금은 더 살 수 있는 나이인데 수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부인과 가족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 가입한 각종 단체가 19개나 된다. 당초 20개였는데 6년 전 아내가 저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부부친목계가 깨져 19개가 된 것이다. 이 중에는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다. 나의 유년기 때 친구들이다. 그 다음은 중학교 동창회다. 소위 사춘기시절 팔팔할 때의 친구들이다. 한국전쟁 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입학해 1957년에 졸업한 졸업생들로 동기생(졸업생)이 118명 이었는데 지금 소식이 닿든가 모임 또는 애경사 때 만나는 친구들은 60여 명 밖에 안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모임으로 1960년 2월 졸업했다.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가 났을 때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고는 모두가 흩어졌다. 진학을 하든가 군대를 가든가 취업을 하든가 했다. 어려울 때 청운의 뜻을 품고 헤어졌다. 그리고 필자는 대학을 못 갔기 때문에 대학생활은 없다. 이런저런 직장잡기에 정신이 없던 때였다. 내 인생의 혼동기였다. 이때 홍천에 와서 소규모 장사를 했든가 상점에서 직원을 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어엿한 가장들이 되고 재산도 모아 잘들 살고 있다.

이때 사귄 친구들로 구성된 친목계도 꾸준히 모임을 갖다가 타지로 이주하는 자들이 늘면서 자연히 깨지고 동갑내기(신사회) 모임이 활발하다. 나이가 같기 때문에 이질감이 덜하고 합심이 잘된다. 대소사 일이나 애경사 때도 그 어느 단체모임보다 잘 모인다. 처음에는 부부가 따로따로 모였으나 지금은 같이 모이고 있다. 필자는 창립회원은 아니지만 꽤 오래된 모임의 친구들이다. 초창기에는 30여 명이었으나 탈퇴하고 제명되고 작고해서 현재는 12명으로 줄었다. 매월 한 번씩 만나는 지인들이다. 이들과는 말 그대로 흉허물 없이 대화를 나눈다.

필자는 농협은행에서 30여 년간 근무를 해서 직장퇴직 직원들의 모임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1967년 공채 신규직원의 동기생들이다. 당초 30여 명이었는데 50여 년이 넘고 보니 현재는 20명으로 줄었다. 여자는 없고 남자들만으로 입사해서 대부분 1998년도 경에 퇴직을 했다. 이들은 같은 입사동기생들이지만 재직기간이나 승진여하에 따라 퇴직 무렵에는 몇 단계의 격차가 났다. 이를테면 군지부장을 했든가 지점장 또는 과장 등으로 직급이 서로 달랐으나 모임 때는 모두가 똑같다.

중고등학교 동창모임에도 소위 성공을 했다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들 간에 약간의 이질감이 있으나 필자의 경우는 신경이 둔해서 전혀 그런 쪽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현직 시절에 “야 너 있을 때 잘해. 그래야 퇴직하면 외롭지 않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동창은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고 으스대다가 친구 하나 없이(모임에도 불참) 외톨이로 말년을 보낸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급한 불행이 닥쳐왔을 때 얼른 생각나는 지인 열사람만 떠올라도 그는 대인관계에서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또 이중에서 내 고충을 들어줄 세 사람만 있어도 그는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어려울 때 뛰어와 줄 수 있는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볼 문제다. 정승(권력자)집 개가 죽으면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작 당사자인 정승이 죽으면 파리만 날린다는 얘기가 있다. 

곤궁할 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대하면 된다. 어떤 모인이든지 상대가 나를 잘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잘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좋은 친구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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