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5]

김부식은 유학을 숭상한 보수파이고, 정지상은 노장사상에 경도된 개혁파였다. 두 사람은 시에 대한 경쟁심도 남달랐다. 관직을 비롯한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자부하는 김부식도 詩에서 만은 정지상보다 처졌다. 정지상이 쓴 琳宮梵語罷 天色浮瑠璃(절간에 독경 소리 끝나니, 하늘빛 유리처럼 맑아지네)를 보고 탐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오라기 높이 날아 멀리 사라져 가고, 외로운 돛만 홀로 가벼이 떠간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題松都甘露寺次惠遠韻 (제송도감로사차혜원운)[2] / 뇌천 김부식
해오라기 높이 날아 사라져 떠나가고
외로이 홀로 돛만 가볍게 떠나간다네
달팽이 공명 찾아서 헤매었던 반평생.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백조고비진    고범독거경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자참와각상    반세멱공명

지금까지 공명만을 찾아다닌 나의 반평생이(題松都甘露寺次惠遠韻2)로 변역해 본 율(律)의 후구인 오언율시다. 작자는 뇌천(雷川)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해오라기 높이 날아 멀리 사라져 가고 / 외로운 돛만 홀로 가벼이 떠가는구나 // 생각하니 부끄럽구나. 달팽이의 뿔 위에서 / 지금까지 공명만을 찾아다닌 나의 반평생이]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송도 감로사 혜원 스님 차운하며2]로 번역된다. 시인은 감로사에 올라 그 곳의 맑고 깨끗한 경치에 속세의 오욕에 물든 마음마저 깨끗해가는 탈속의 심경을 노래한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절로 생긴 감격스런 자기 심회를 일구어 놓아 후대엔 가작佳作이란 평가가 많다. 전구에는 [속객의 발길 닿지 않는 곳/ 올라서니 생각이 해맑아지네 // 산 모습 가을이라 더욱 곱고 / 강물 빛 밤인데도 외려 밝기만 하다]는 시상이다.

시인은 못다 한 선경의 시상이 남아있던지 하늘 나는 해오라기와 외로운 돛배 시상의 얼개를 엮었다. 해오라기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로운 돛배만 홀로 가벼이 떠간다 했다.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시상의 경지를 모두를 시지詩紙에 옮길 모양을 보인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어 이제 율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기 심회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노출하려는 속셈을 엿보인다. [부끄럽다. 달팽이 뿔 위에서 / 공명을 찾아다닌 나의 반평생]이라는 심회를 털어냈다.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 했다. 달팽이 뿔 위에서 벼슬 한자리 하려고 발버둥치는 속세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빗대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해오라기 멀리 날고 돛만 홀로 떠나구나, 달팽이의 뿔 위에서 공명 찾는 내 반평생’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뇌천(雷川) 김부식(金富軾:1075∼1151)으로 고려 중기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 관직을 두루 거쳐 직한림원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에 종사하면서 왕에게 경사經史를 강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白鳥: 백조. 해오리기. 高飛盡: 높이 날기를 다하다. 孤帆: 외로운 돛. 獨去輕: 홀로 가볍게 떠가다.  自慚: 스스로 부끄럽다. 蝸角上: 달팽이 뿔 위에서.  半世: 반생. 여기서는 지금까지로 해석함이 좋음. 覓功名: 공명만을 찾다. 곧 부귀공명을 애써서 찾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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