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010]

무더운 여름에 어름을 먹었던 것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서빙고 같은 시설이 있어 어름이 어는 계절에 어름을 모아두었다 필요한 여름에 꺼내서 사용하면 어름의 효능은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찬 물만 넣어 얼리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조미료를 넣어서 얼린다면 아이스케키나 크림 맛이 나겠다. 좋은 술은 침상머리에 놓아야 제 격인 것인데, 어찌해 작은 시냇가로 옮겨 놓았냐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詠氷壺(영빙호) / 빙호당
좋은 술은 침상머리 놓아야 제격인데
어찌하여 시냇가로 옮기어 놓았는지
꽃피어 딴 세상 있음을 이제야 알겠네.
最合床頭盛美酒      如何移置小溪邊
최합상두성미주         여하이치소계변
花間白日能飛雨      始信壺中別天地
화간백일능비우         시신호중별천지

비로소 술 병 속엔 딴 세상 있음을 이제 알겠네(詠氷壺)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빙호당(氷壺堂: ?~?)으로 선조 때의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좋은 술은 침상머리에 놓아야 제 격인 것인데 / 어찌해 작은 시냇가로 옮겨 놓았을까 // 꽃핀 대낮에도 비가 날릴 수 있으리니 / 비로소 술병 속엔 딴 세상 있음을 이제 알겠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어름에 넣은 술병을 읊다]로 번역된다. 술은 따뜻한 방에서 잘 익는다. 누룩과 고두밥을 버무려 하룻저녁을 지내고 나면 ‘단술’이란 과정을 거치면서 완숙된 술이 되는 한 과정이다. 이런 술은 따뜻한 방에서 가능하고 아녀자들은 남정네들의 기호식품인 술을 마치 자기 솜씨 자랑은 물론 온 몸으로 생각했다.

시인은 이와 같은 술을 함부로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을 시상의 내음 속에 물씬 풍겨 나온다. 좋은 술은 내가 아끼면서 침상머리에 놓아야 제 격인 법인데, 어찌해 작은 시냇가로 옮겨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의 당호인 ‘빙호(氷壺)’에 비유해 집안의 상에 있어야 할 빙호가 바깥 세상에 나온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딴전을 부리면서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술병이 놓여있는 위치를 전환시킨다. 꽃이 핀 대낮에도 이따금 비가 날릴 수가 있으리니, 비로소 술병 속엔 딴 세상 있음을 알겠다고 했다. 집안과는 색다른 외부세계를 경이로운 별천지로 인식하는 부녀자의 순수한 시심을 본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와 자아의 각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좋은 술이 제격인데 작은 시내 옮겨놓아, 대낮에도 비 내린데 술병 속엔 딴 세상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빙호당(氷壺堂: ?~?)은 여류시인이다. 조선 시대 전기 한시 작품을 남긴 왕실 여성으로는 종실(宗室) 숙천령(肅川令)의 부인이다. 숙천령은 세종의 증손자인 이기(李琦, 1515~?)이며, 그는 선조(재위 1567~1608) 때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자신의 호를 노래한 [영빙호詠氷壺]가 있다.

【한자와 어구】
最合: 가장 적합하다. 제격이다. 床頭: 침상 앞. 盛美酒: 좋은 술을 놓다. 如何: 어찌해서. 移置: 옮겨두다. 小溪邊: 작은 시냇가. // 花間: 꽃 사이. 白日: 백일. 能飛雨: 비가 내릴 수 있다. 始信: 비로소 알겠다. 믿다. 壺中: 술 병 속에. 別天地: 별천지가 있다는 것.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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