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현대판 고려장이 요즘의 요양원이다. 고려장의 유래는 이렇다. 먼 옛날 어느 시골에서 늙은 노모를 더 이상 집에서 모실 수 없어 당시의 풍습에 따라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속 깊숙이 올라갔다. 고려장을 하기 위해서다. 길은 험하고 인적은 없다.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르는 그 아들의 심정은 어떠하랴.

그 뒤에는 여나무 살쯤 된 손자가 뒤를 따랐다. 노파는 고개를 오를 때마다 나뭇가지를 한 개씩 꺾었다. 애비가 “어머니 나뭇가지는 왜 꺾으세요?” “얘 애비야 네가 나를 두고 내려갈 때 길을 잃을까봐 그런다”라며 산행의 길잡이 표시를 했다.

드디어 고려장을 했다. 고려장이래야 별 것이 아니다. 움막을 짓든가 호를 파서 비가림을 하고 며칠 먹을 밥과 물을 넣어둔다. 대개 3~4일이면 때를 다 채우고 며칠 있으면 사망이다. 이들 부자도 고려장을 마치고 하산을 했다.

아버지가 먼저 내려오고 뒤따라오던 아들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지고 갔던 지게를 지고 내려오려고 했다. “얘야 그 지게는 버리는 거다” 하니까 아들이 “아니에요. 이걸 가지고 가야 이담에 아버지가 늙고 힘없으면 제가 아버지를 이 지게에 지고 와야 하잖아요” 했다. 아버지는 크게 깨달은 게 있어 다시 노모가 있는 데로 가서 노모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그 후부터 고려장제도가 없어졌다고 한다. 옛날얘기다. 허나 여기서 우리는 배우는 바가 많다. 현재는 어떤가. 집에서 도저히 모시지 못할 경우에 유료 요양원에 부모를 모시는 경우가 다반사다.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인양 한다. 

고려장과 다르다면 요양원은 그 대상자가 부모만이 아니고 가족이라는 점과 요양원에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 들면 병들고 죽게 마련이다. 누구나 똑같다. 다만 그 시기가 다를 뿐이다. 인간의 한평생은 생노병사 희노애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카톡 한 구절이 왔다. 내용인즉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할아버지와 두 내외 4 살배기 아들이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식사 때 접시를 떨어뜨려 깼다. 음식도 흘리고 지저분하게 식탁을 접했다. 젊은 부부는 어느 날부터 노인에게 별도의 식탁을 주며 방에서 식사하게 했다.

힘없고 재력 없는 노인은 아들며느리가 하는 대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몇 달 지난 뒤 아들이 방에서 나무로 무엇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얘야 다칠라. 뭘 그렇게 만드냐?” “이거요? 이담에 아빠엄마가 늙어 할아버지처럼 되면 쓰려고 안 깨지는 나무접시와 그릇을 만드는 거예요” 한다.

역시 여기서 크게 뉘우치고 이 부부는 당장 그날부터 할아버지를 같은 식탁에 앉게 하고 대신 턱받이와 식사 때 잘 깨지지 않는 큼직한 접시를 준비했다. 그 후부터 즐거운 식사시간이 됐다고 한다. 
세상에는 생각과 이해와 역지사지의 마음이 있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핵가족시대다. 또한 혼자 사는 시대다.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아무리 효자효부도 부모를 한 집안에서 평생 모실 수는 없다. 과거 농경사회에는 우리나라도 부모를 모시는 것을 효의 근본이라 하여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나 요즘은 맞벌이시대에 초경쟁시대다. 과거의 백년이 현재의 10년이나 1년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다.

고려장도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겠고 현재의 요양원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일 게다. 우울한 일을 깊이 생각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모든 게 그러려니 하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 긍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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