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006]

부산하기만 하던 청사廳舍의 조용한 휴일 오후였던 모양이다. 할 일도 없고 고향 생각도 나고 친구들의 얼굴도 스친다. 그것은 꿈속에서 중얼거렸던 한바탕 상상이었다. 그래도 무심한 졸음이 시인 곁을 지켜가면서 고운 꿈결에서 신나는 장면을 보라고 재촉한다. 모두가 퇴청하고 없는 청사는 더없이 한가롭기 그지없었음을 보인다. 성긴 발을 반쯤 걷고 층층인 산을 향하니, 골짜기마다 솔바람에 푸른 안개가 움직인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直廬(직려) / 연담 곽예
성긴 발을 반쯤 걷고 층층인 산을 향해
골짝마다 솔바람에 푸른 안개 움직이고
정오의 창에 기대어 하늘의 음악을 듣는다.
半鉤疎箔向層巔      萬壑松風動翠烟
반구소박향층전        만학송풍동취연
午漏正間公事少      倚窓和睡聽鈞天
오루정간공사소        의창화수청균천

창에 기대어 편하게 졸면서 하늘의 음악을 듣는다네(直廬)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연담(蓮潭) 곽예(郭預:1232~1286)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성긴 발을 반쯤 걷고 층층인 산을 향하니 / 골짜기마다 솔바람에 푸른 안개가 움직이네 // 정오는 바야흐로 한가롭기 그지없고 공사도 없는데 / 창에 기대어 편하게 졸면서 하늘의 음악을 듣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청사에서 당직하며]로 번역된다. 당직하면서 한가한 한때를 즐겼던 모양이다. 관사를 지키는 것이 제 임무이건만 그것도 잠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도 설계하는 일도 잠시도 쉬지 않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 시를 두고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곽예는 밀직부사로 위 시는 부유하고 화려한 기상 가운데 한가하고 널따란 뜻이 담겨있다고 평했다.

시인은 문을 열어놓고 먼 산천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면서 깊은 사색에 빠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글디 성근 발을 반쯤 걷고 층층인 산을 향해 보니 골짜기마다 솔바람에 푸른 안개가 움직인다고 했다. 미풍을 타고도 안개는 부동의 자세에서 미동의 자세를 취하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화자는 당직근무를 하고는 있지만 지금처럼 토요일이나 일요일과 같은 한가한 한낮은 화자도 자연의 깊은 영상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렷다. 정오는 바야흐로 한가롭기 그지없고 공사公事도 같이 쉬고 있는 것인지 창에 기대며 편하게 졸면서 하늘의 음악을 듣는다는 시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가하기 그지없고 광활한 기상을 맛보는 주변 풍경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층층이 산을 향해서 푸른 안개 움직이네. 한가로워 공사 없고 졸면서도 음악 듣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1권 1부 外 참조] 연담(蓮潭) 곽예(郭預:1232∼1286)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가 주살되자 내원령으로서 중승 홍문계, 장군 송분과 더불어 왕에게 하례하고 곧 수도를 강화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박하여 변함이 없었다.

【한자와 어구】
鉤: 갈고랑이. 箔: 발, 주렴 漏: 새다, 스며들다, 鈞: 서른 근, 고르다. 鈞天廣樂: 아주 미묘한 천상(天上)의 음악. 萬壑: 많은 골짜기.松風: 소나무 바람. 動翠烟: 푸른 안개 움직이다. // 午漏: 정오를 가리키는 물시계. 公事少: 공사가 적다. 倚窓: 창에 기대다. 和睡: 펀하게 졸다. 聽鈞天: 하늘 음악을 듣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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